[쿠키뉴스] 글·사진=곽경근 대기자/ 장마가 시작되었다지만 비는 오지 않고 습도가 제법 높았던 지난 7월 1일, 카메라를 둘러메고 한양도성 순성길에 나섰다. 남산의 명물 친환경전기버스를 타고 남산 정류장에 내려 정상을 향했다. 날씨가 습해서인지 잠시 발걸음을 옮겼는데도 내의가 벌써 땀으로 축축하다. 정상에 오르니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인왕산으로 옮겨간 국사당이 있었던 남산 팔각정은 공사로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서울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전망대 계단에서 한양도성과 인왕산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던 화가이자 건축가 김석환(61) 씨를 만났다. “한양(서울)은 삶터로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남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바라보면 한양도성의 지형지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차분히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600년 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고 말했다.
복원된 남산봉수대와 공사로 막아놓은 잠두봉 포토아일랜드를 지나 한양도성유적전시관에서 직접 유적 발굴작업을 진행했던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에게 발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돌아보고 특별한 고증 없이 급히 쌓은 백범광장아래 회현 구간 성곽도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본 후 다시 1.7km 국치(國恥)길의 시작인 조선신궁 배전터로 올라왔다.
'국치길'은 말 그대로 '나라의 수치’인 일제 침탈의 흔적을 돌아보는 남산 다크투어(Dark Tour) 코스이다. ‘다크투어’란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역사교훈여행’이다.
이 길 아래에는 일제가 훼손한 남산의 흔적과 아픔 외에도 공포정치의 산실 중앙정보부의 상흔들도 함께 되짚어 보는 ‘인권의 길’을 만나게 된다. 최근 남산 되찾기 사업의 하나로 남산예장공원이 문을 열었다. 이곳 이회영기념관에서 독립운동가 우당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마음에 되새기고 국치길의 마지막 코스인 통감관저 터를 찾았다.
이곳에는 일제에 짓밟힌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공원 ‘기억의 터’가 조성되어 있다. ‘기억의 터’ 한 가운데 설치된 조형물 ‘세상의 배꼽’에 쓰여진 문구가 오래도록 시선을 머물게 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600년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한양도성은 총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른다. 쿠키뉴스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도시 서울을 되짚어보는 ‘한양도성 둘러보기(巡城)’를 10회에 걸쳐 연재(순서는 기사하단) 중이다.
- 남산 국사당 터에서 통감관저 터(기억의 터)까지
- 순성길에서 만난 국치길과 인권길
- 조선신궁에서 옛 중앙정보부까지 다크투어리즘
- 일제가 할퀸 상처, 더 깊게 상처 낸 군사정권
- 안중근, 김구, 이회영 선생 등 민족 지도자의 혼으로 치유
- 시대별 축성 모습 한 눈에, 한양도성유적전시관
- 백범광장 아래 성곽, 어설프게 재현
-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와 떠난 순성길
▶ 일제가 할퀴고 우리 손으로 훼손한 ‘남산’
경복궁과 마주한 목멱산을 바라보며 조선의 왕들은 국태민안을 기원했다. 백성들도 목멱산 정상의 봉수대에서 해질 무렵 피어오르는 한 줄기 봉화에 변방의 무사를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조선시대 목멱산은 국토와 왕경을 수호하는 신산(神山)으로 산 정상에는 목멱대왕을 모셔놓은 ‘국사당’(國師堂)이 자리했다. 이처럼 목멱산으로 불렸던 남산은 왕과 백성이 모두 우러러 보는 한양 중심의 영산(靈山)이었다.
조선 500년 도읍지 한양의 수호산인 남산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건 1880년대 중반부터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정국이 요동친 직후인 1885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해 ‘왜성대(倭城臺)’라 불렸던 예장동(藝場洞)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한다.
남산을 거점으로 본격적으로 조선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입경하는 일본인 수가 해마다 배 이상 급격히 늘어나면서 1898년, 지금의 숭의여대 자리에 경성신사를 세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정치가 실시되면서 일본은 남산에 통감부 청사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식민통치에 들어간다. 이미 을사늑약 체결 전인 1904년 통감부 동쪽에 일제 무력통치의 중추기관이 일본헌병대사령부(현 남산골한옥마을)가 들어섰다.
1900년대 초 남산 일대는 경성이사청 외에도 정무총감 관저, 일본 적십자사 등이 들어서면서 식민통치의 심장부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1906년에 설치한 경성이사청은 예장동 주변을 경성공원으로 만들고, 남산식물원 자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회현동 일대에 30만 평을 고종에게 영구 무상 임대 형식으로 받아내 1908년 한양공원을 조성한다.
마침내 한일병합 일주일 전인 1910년 8월22일, 고종에게 전권위임장인 ‘칙어’을 받아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남산자락의 통감관저를 찾아 데라우치가데라우치가 내민 한일병합조약 서류에 일고의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고 나라를 통째로 넘겼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조선왕조의 500년 명줄이 완전히 끊기는 순간이다.
조선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일본은 백성의 출입과 개발이 제한되었던 남산 일대를 마음대로 훼손하면서 핵심 통치기구인 통감부와 총독부를 비롯하여 각종 기관과 일본거류민들을 위한 주거지, 상업시설 등을 전면 배치한다.
남산 자락인 충무로와 퇴계로, 명동 일대는 일본식 신시가지로 꾸며 북촌에 견주어 ‘남촌’으로 불렀다. 식민지배층의 특권적 공간 남촌에는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경성우편국(현 중앙우체국),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등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주로 조선인이 살고 있는 북촌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1906년 1만 명이 조금 넘던 일본인은 한일병합이 되던 1910년 서울 인구의 14%인 3만3천명에 달했다.
3,1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남산 산록 중 가장 눈에 띄는 회현자락에 조선신궁을 세워 조선인의 정신까지 옭아매었다. 경성의 랜드마크인 남산은 그들이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경성-용산 축의 중심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해방 전 일제가 허문 남산 정상의 국사당 터에 서서 산 아래를 둘러본다. 조선신궁을 시작으로 경성신사와 노기신사, 동본원사(東本願社), 통감부(조선총독부)와 통감부관저, 일본군헌병대, 정무총감 관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로 식민지배층의 특권적 공간인 신시가지 남촌이 화려하게 자리 잡고 우측 장충동 방향으로는 박문사와 장충단공원이 멀리 보인다.
뒤를 돌아 한강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서빙고 방향에 공병대와 기병대, 연병장, 용산 쪽으로 오면서 사격장, 일본군 20사단 보병 제78연대와 보병 제79연대, 야포병대가 남산자락을 파헤치고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인 잃은 민족의 영산은 식민 지배국의 통치기구와 침략기구에 갇히고 한양도성을 훼손하고 지은 조선신궁의 위세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남산은 식민지배의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 채 광복과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 경제 발전 과정에서도 훼손이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말에 세워진 경성호국신사 자리에는 해방촌이 들어섰다. 이어진 적산 처리 과정에서 동국대를 비롯해 중앙방송국, 숭의학원, 미군 통신부대, 외인주택, 아파트, 호텔 등과 각종 정부기관과 학교, 군 및 종교단체가 들어서면서 남산은 다시 한 번 우리 손에 의해 파괴되는 아픔을 겪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벌거벗겨진 전국 산의 녹화사업에 힘썼던 박정희 정권도 유독 남산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동상과 기념물 그리고 터널과 타워는 남북 체제 경쟁과 정치이데올로기 홍보의 상징이었다. 공포정치의 상징 중앙정보부 역시 남산 예장자락을 남모르게 파헤쳤다. 40여개 건물을 차지하고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며 정권의 홍위병 역할을 자임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하는 아픈 우리의 역사 현장이다. 순성 길에서 잠시 벗어나 국치길과 인권길을 돌아보면서 새삼 한양도성 600년 역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 남산 국사당 터와 팔각정
현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이다. 태조를 비롯해 조선의 왕들은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영산(靈山)인 이곳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를 지냈다. 국사당은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졌다. 국사당의 첫 명칭은 제사 지낼 사 '祀'를 썼으나 이후 스승 사 '師'로 바뀌면서 무학대사와 이성계 등을 모시는 사당이 된다. 제1공화국 시절에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도 불렀는데, 4·19 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목멱산 봉수대 터
목멱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전국팔도에서 올리는 봉수(烽燧)의 종착점이자 중앙 봉수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視覺) 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봉수대는 전국에 620여 개소가 있었으며 이들은 목멱산(남산)에 있는 5개소의 경봉수(京烽燧)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어 있었다. 목멱산 봉수대는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여 년 간 존속하였다. 현재의 목멱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고증하여 1993년 남산 제 3봉수자리로 추정되는 현 위치에 복원했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이다.
-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남산 서쪽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예부터 잠두봉이라 불렸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북한산을 비롯해 외사‧내사산에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숲과 인왕산 자락에 길게 이어진 한양도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쉽게도 공사 중이어서 전망대 입장은 불가하다.
- 한양도성유적전시관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일대는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이다. 서울시는 2013년~2014년 한양도성 보존 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했다. 현 전시관 일원에서는 총 길이 약 189m의 한양도성 유적이 발굴되었다. 발굴 결과 땅 속에 묻혀 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유구는 조선시대 축성 기법과 석재(石材)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유적전시관이 자리 잡은 남산 자락은 한양도성의 오랜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양도성 유적(1396)을 비롯해 조선신궁 배전 터(1925), 남산 분수대(1969) 등을 포괄하는 전시관 권역에서는 조선시대 축성의 역사, 일제강점기의 수난, 해방 이후의 도시화, 최근의 발굴 및 정비 과정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내내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 유적은 태조(14세기), 세종(15세기), 숙종 이후(18~19세기)에 쌓았던 부분들이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어 시기별 축성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성곽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조치욱 학예연구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발굴작업 도중 평범하지만 뭔가 다른 성 돌 하나를 만났다. 직감적으로 각자성석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풍화가 많이 진행되고 돌 자체가 약해서 탁본으로도 글자를 특정하기 쉽지 않아보였다. 더 훼손될 것 같았다.”면서 “아이디어를 냈다. 휴지를 물에 풀어 조심스럽게 성돌에 새겨진 글자 한획 한획에 붙여나갔다. 그러자 ‘내자육백척’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현장에서 붓으로 흙을 털어내며 터득한 일종의 임기응변이 통한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자의 번득이는 지혜로 묻힐뻔한 유물이 세상에 빛을 본 순간이었다.
한양도성의 유구와 함께 6~70년대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남산분수대 자리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의 기초가 발견되기도 했다. 1956년 당시 2억6백만환의 거금을 들여 제작한 이승만의 동상은 4.19 혁명으로 해체되었지만 본체만 7미터의 높이에다, 기단까지 합치면 무려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이었다.
- 백범광장공원과 안중근 기념관
남산공원을 올라가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 공원의 넓은 잔디밭 주변으로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상 등 항일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혼과 정신으로 대체한 것이다. 백범광장 일대의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을 건축하면서 철거되거나 흙 속에 묻혔다가 100여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지형 훼손이 심해 원형을 살릴 수 없는 구간에는 성벽이 지나던 자리임을 알 수 있도록 바닥에 흔적 표시를 했다.
- 남산자락(회현구간) 서울성곽
백범광장공원에서 SK남산빌딩까지 복원된 한양도성 성곽길이 이어진다. 힐튼호텔에서 남산방향으로 오르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한양도성 성곽에 대한 설명과 함께 태조, 세종, 숙종 시 초축과 개축한 성돌 모양과 함께 상세히 내용이 쓰여져 있다. 하지만 안내판 맞은편에 복원된 성곽 형태는 아무리 보아도 어느 시대 성곽을 복원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시대와 국적 불명이다. 전문가들 사이에는 한양도성 복원이 아니라 ‘서울성곽’ ‘신축성곽’ 정도로 표현하는게 맞을 것 같다고 말한다.
여하튼 백범광장 아래로 S라인을 그리는 성곽과 함께 바라보는 도심야경은 연인들이 즐겨찾는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 스팟’이다.
▷ 국치길
국치길의 각 역사 현장에는 ‘ㄱ’ 모양의 1910cm의 스탠드형 안내 사인이 설치되어 있다. 나라를 잃은 1910년을 의미한다. 1.7km 국치길 보도블록 곳곳에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한글 자음 ‘ㄱ’ 모양의 로고 동판에 ‘1910’ ‘1945’ 숫자가 박혀있다. 국치에서 광복까지 기간을 뜻한다.
- 조선신궁 터
일제는 조선의 왕이 살고 있는 궁궐이 한눈에 내려 보이는 남산 자락에 경성신사나 노기신사보다 격이 높은 신궁을 1925년 완공한다. 조선신궁은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천황을 신으로 모시면서 우리민족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처럼 남산은 일제가 기획한 식민 통치의 실체이며 상징 공간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한 일본은 바로 이튿날, ‘신성한 신을 하늘로 돌려보낸다’는 승신식(昇神式)을 가진 후 그들의 손으로 신궁을 소각했다.
- 위안부 기림비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태는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할머니의 증언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국가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연대하며 진실을 밝히는 계기가 된다. 기림비는 시민들과 더 친숙하게 만날 수 있도록 동상의 단을 없애고 맨 땅에 세워졌다. 손을 맞잡고 선 한국과 중국, 필리핀의 세 소녀를 김학순 할머니가 바라보는 조형물이다.
- 한양공원 비
한양공원비는 남산케이블카 승강장에서 100여m 올라간 지점에 위치한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1908년 남산 기슭 30만평을 무상임대 받아 조성한 위락시설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10년 공원 입구에 표지석을 세웠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한양공원비의 비문은 고종의 친필로 전해진다.
비석 뒷면은 누군가에 의해 정으로 쪼아 놓은 듯 훼손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 경성신사 터
경성신사는 일제가 우리나라에 만든 최초의 신사다. 1898년 일본거류민단이 이세신궁에 모셔져 있던 신체일부를 옮겨와 남산대신궁으로 창건 후 1916년 경성신사로 개칭했다. 현재는 터만 남았고, 숭의여자대학교 내에 위치한다.
청일전쟁에서 승전한 뒤 일제가 세운 ‘갑오역(갑오전쟁)기념비’ 터도 학교 내에 있다.
-노기신사 터
일본은 신사를 지어 천황은 물론 전범영웅도 신으로 섬기는 문화가 있다. 노기신사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모셔놓은 신사로 신사 입장 때 손을 씻었던 수조와 석재 일부가 현재 남산원 초입에 있다. ‘코로나19’ 방역조치로 남산원 내부의 잔존 유적은 관람 불가이다.
- 통감부·조선총독부 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1905년에 을사조약(을사늑약)을 맺고, 1906년 통감부를 세웠다. 통감부는 강제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로 바뀌었으며, 1921년 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이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경복궁 안의 새 청사를 지어 옮겨졌으며, 남산에 있던 통감부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서울애니메이션 센터 앞 정류장에 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만이 세워져 있고 현재 발굴 작업 중이다.
- 남산예장공원
남산 예장자락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시민의 쉼터, 명동 등 인근 지역과 연결되는 관광허브로 복원돼 '남산예장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6월 9일 개장했다. 남산예장공원은 크게 지상 녹지공원과 명동~남산을 보행으로 연결하는 진입광장과 이회영기념관, 친환경 버스환승센터 등 공원 하부 지하 시설로 조성됐다.
서울시가 남산의 자연경관을 가리던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과 TBS교통방송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7천 평 규모의 녹지공원을 조성했다. 공원 조성 과정에서 발굴된 조선총독부 관사 터의 일부를 그대로 보존한 유구터도 있다.
예장공원 하부 지하공간에는 온 집안이 전 재산을 들여 독립운동에 나섰던 우당 이회영과 6형제를 기념하는 ‘이회영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후손이 기증한 유물과 100년 전 우리 독립군의 봉오동·청산리 대첩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체코군단의 무기가 처음으로 공개되는 특별전도 열리고 있다.
-인권길
남산예장공원 내 ‘중앙정보부 6국’이 있던 자리에는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역사를 기억하는 ‘기억6’이라는 공간을 조성해 현재 전시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기억6’ 뒤로 보이는 건물인 소방재난본부(중앙정보부 서울시지부)와 현 유스호스텔(중앙정보부 본관), 서울시청 남산1별관(중앙정보부 5국)으로 사용 중인 건물들이 군사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건축물이다. 40여동의 중앙정보부 시설물은 서초동 국가정보원으로 이전하면서 국가중요보안시설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해체되었다. 중앙정보부 6국 터에서 중앙정보부 5국에 이르는 900여m 구간을 ‘인권길’이라 부른다.
- 통감관저 터/ 기억의 터
1906년 지어진 통감관저는 1910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 통감과 총독의 관저로 쓰였다. 지금 그 터에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기억의 터’가 자리한다. 기억의 터는 초등생부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단체, 노조 등 2만 여명이 3억5천만원을 모금해 조성했다. 임옥상 화백이 지휘한 <대지의 눈>, <세상의 배꼽> 등 두 개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이곳에는 ‘거꾸로 세운 동상’도 눈에 띈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공을 세운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통감관저 앞에 세웠는데, 해방 후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워 당시의 치욕을 되새기고 있다.
<대지의 눈>에는 고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끌려감’과 함께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이 시기별로 새겨져있다. <세상의 배꼽>은 어머니의 자궁, 배꼽을 형상화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상징한다. 배꼽 위치인 작품 중앙에는 모성으로 세상을 보듬는다는 뜻에서 윤석남 화가가 그린 손 그림이 새겨졌다. 그리고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글귀가 한글과 일본어, 영어, 중국어로 함께 적혀있다. 작품 주변에는 전 세계에서 마음을 모은 할머니들과 시민들을 뜻한다는 메시지의 바위들이 놓여 있다.
기억의 터에서 멀지않은 일본헌병사령부가 자리했던 남산골한옥마을에서 8번째 순성길을 마무리해도 좋다.
-연재 순서
① 보신각종이 울리면 한양은 깨어난다.
②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사직단에서 인왕산 선바위까지)
③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수성동계곡에서 무계정사까지)
④ 궁궐이 발아래“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⑤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와룡공원에서 낙산공원까지)
⑥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장충동골목길까지)
⑦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
(장충단에서 N서울타워까지)
⑧ 일제가 할퀴고 우리가 덧낸 남산
(국사당 터에서 통감관저 터까지)
⑨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숭례문에서 돈의문 터 까지)
⑩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까?
“함께 걸어요” 한양도성 순성길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