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산부인과, 말만 바꾸면 소용없어요

치매·산부인과, 말만 바꾸면 소용없어요

“질환 둘러싼 사회적 문제 들여다 봐야”
“의사와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대안 필요”

기사승인 2021-12-31 07:00:02
이미지=이희정 디자이너

“주택청약 통장을 모르면 거의 치매 환자”
“무슨 중증 치매환자도 아니고 집값이 안정됐다고 하나”

지난해와 올해 공인들의 입에서 나온 발언이다. 치매라는 단어의 용법은 병원 안팎에서 매우 다르다. 의사들은 기억력, 판단력, 계산능력 등의 인지기능이 저하된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하지만 병원 밖 일각에서는 상대방을 비난하고 모욕하기 위해 치매를 언급한다. 치매 증상을 가진 환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 수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회적으로 치매는 두려움, 편견, 비하를 내포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5월 만 19세 이상 국민 1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3.8%는 ‘치매라는 용어에 거부감이 든다’고 답했다. 거부감의 원인으로는 ‘치매라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고 답한 비율이 60.2%로 가장 많았다. ‘치매라는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17.9%)과 ‘환자를 비하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7.6%)이라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이에 치매를 다른 말로 바꾸자는 의견이 이어지고 있다. 치매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리석을 치(癡)'에 '미련할 매(呆)',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의미다.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문자부터 긍정적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국회에는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발의한 치매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된 상태다. 두 개정안 모두 치매에 담긴 부정적 의미를 지적하며 새로운 단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다. 김 의원의 대안은 ‘인지저하증’, 이 의원의 대안은 ‘인지흐림증’이다.

의료계에서 이름표 교체가 제안된 영역은 이뿐만이 아니다. 산부인과 명칭에도 변화가 시도되고 있다. 산부인과의 한자를 풀이하면 '낳을 산(産)'과 '부인(婦人)'이다. 의미를 직역하면 결혼한 여성이 출산을 하는 진료과라는 뜻이다. 산부인과는 산과, 일반부인과, 부인종양학과, 생식내분비학과, 비뇨부인과를 아우르는 넓은 범위에 걸쳐 여성의 건강을 다루지만, 명칭은 이를 포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여성건강의학과'가 산부인과를 대체할 새로운 명칭으로 제안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미혼 여성이 산부인과를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며 “(산부인과는) 임신과 출산 등 기혼 여성을 위한 병원이라는 선입견이 큰 탓”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여성건강의학과 명칭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후보는 “명칭 변경부터 시작해 혼인과 출산 여부,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여성이 안심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의료 환경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의 지적대로 산부인과에 대한 인식은 개선의 여지가 크다. 산부인과는 일반 내과, 가정의학과 의원처럼 필요에 따라 거리낌 없이 방문하기는 어려운 장소다. 여성들 사이에서는 산부인과 진료실의 검진대가 ‘굴욕 의자’로 불린다. 분만 전 진행하는 관장, 제모, 내진을 이른바 ‘산부인과 3대 굴욕’으로 일컫기도 한다. 산부인과 내원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긴 은어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명칭 변경의 취지에 공감하고 있다. 다만, 이름만 바꾸는 것은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치매가 부정적 이미지와 결부되는 현상은 단순히 글자 때문이 아니다. 치매 증상이 있는 환자를 위한 정책적 보호망이 충분치 않고, 사회적 포용력도 떨어지는 환경이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마찬가지로 산부인과가 여성건강의학과로 불린다고 해서 여성들의 심리적 문턱이 낮아지는 효과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 질환을 다루는 다른 진료과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발생할 우려도 적지 않다.

최호진 대한치매학회 정책이사는 “명칭을 개정하려면 최대한 과학적 타당성을 확보하고, 현재의 잘못된 명칭에 따른 편견을 해소하는 실익이 있으며, 무엇보다 임상 현장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치매라는 글자에만 집중하지 말고, 우리 사회가 치매 환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부터 성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이사는 “치매 환자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에 기반해, 명칭뿐 아니라 질환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복합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정책적인 접근에 국한하지 말고, 의학 전문가들과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며 사회적 수용성과 효용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진료과 명칭은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현장에서 사용되는 말이다”라며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이 제시하는 대체재가 일선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적용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건강의학과라는 대안에 대해 “거부감을 낮춘다는 취지로 여성과 건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검진 사업에 집중된 가벼운 진료과라는 인식이 생기는 역효과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며 “의료계에서는 여성의학과를 적합한 대안으로 제시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와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명칭을 도출하려면 충분한 사회적 합의와 전문가 의견 청취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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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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