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야.” 미국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쓴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 둘째 딸 조는 이렇게 불평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9세기 미국. 목사인 아버지가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 북군에 자원입대하자, 그렇지 않아도 가난하던 살림은 더 궁핍해졌다. 첫째 딸 메그 역시 낡은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투덜댄다. “가난은 정말 끔찍해!”
‘작은 아씨들’을 2022년 한국으로 데려온 tvN 동명 드라마에서도 자매들은 가난하다. 첫째 오인주(김고은)와 둘째 오인경(남지현)이 돈을 벌지만 형편은 여전히 어렵다. 막내 오인혜(박지후)의 수학여행 비용 25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인주는 자신을 따돌리는 상사에게 월급 가불을 부탁해야 한다. 인경은 보기 싫은 고모할머니를 찾아가 머리를 숙인다. 가난에 지친 인주는 “숨만 쉬고 앉았어도 빚이 계속 쌓인다”고 읊조린다.
소설 ‘작은 아씨들’을 영화로 만들어 2019년 선보인 그레타 거윅 감독은 “이 이야기는 내게 여성, 돈, 예술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작은 아씨들’에서 돈과 가난은 중요한 소재다. 원작 소설에서 네 자매는 가난한 형편 때문에 자주 위축되지만, 신세 한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매 중 제일 가난을 견디기 힘들어한 메그는 빈털터리 가정교사 존과 결혼하며 “나는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가난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사교계 여왕을 꿈꾸던 막내 에이미는 부자인 프레드 본의 청혼을 거절한다. “돈이나 지위 이상의 것”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반면 드라마 ‘작은 아씨들’ 속 가난은 불편이나 불행을 넘어선다. 2022년 한국에서 가난은 숨통을 조이는 유독 가스다. 인주는 갓난아기 때 세상을 뜬 셋째 동생을 잊지 못한다. 빚쟁이에 시달리느라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속절없이 죽은 동생을 보며 그는 “돈이 없으면 죽는다”는 말을 가슴에 새겼다. 자기 그림을 부잣집 친구 박효린(전채은)이 그린 것인 양 대회에 출품한 인혜는 “나한테 영혼이란 게 있어서 효린 엄마가 비싼 값에 사준 거면 난 너무 고마운데?”라고 악을 쓴다. “어떤 가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믿는 인경조차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라는 선배의 빈정거림에 할 말을 잃는다.
흉포한 가난의 칼날은 가족마저 흩어지게 한다. 원작 소설 속 네 자매는 자애로운 어머니와 신념 곧은 아버지에게서 가난을 뚫을 힘을 얻는다. 그러나 인주·인경·인혜 자매에게 부모는 없는 게 더 나은 존재다. 아버지는 잇따른 사업 실패로 생긴 빚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딸들이 어렵사리 마련한 막내의 수학여행 비용을 들고 나른다. “무능한데 착한 게 어디 있어. 무능한 게 나쁜 건데.” 이렇게 믿는 인주는 바로 그 무능 때문에 동생에게 외면당했다. 언니들 반대를 무릅쓰고 효린이 부모에게 유학비를 지원받기로 한 인혜는 “난 이 집에서 언니들처럼 사는 것보다, 효린이네서 하녀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자본 증식을 통한 계급 상승이 시대정신이 된 사회.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작은 아씨들’은 돈으로 인한 갈등을 통해 자본주의 최정점에 선 현대사회를 꼬집는다”고 봤다. 작품 속 인물들은 돈 때문에 서로를 속이고, 물밑거래를 하며, 심지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공 평론가는 “인주네 가족은 물론, 막대한 재산을 가진 박재상(엄기준) 가족도 행복하지 않다”면서 “주인공들이 돈을 좆는 과정에서 무엇을 잃는지 되돌아보며 돈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묻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네 자매의 모습을 낭만적이고 따뜻하게 표현한 원작 소설과 달리,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일종의 잔혹동화”라면서 “비리 기업과 정치권력 등 한국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점이 다르다”고 짚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