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국역과 아베 신조의 혼맥(魂脈) [쿠키칼럼]

지하철 안국역과 아베 신조의 혼맥(魂脈) [쿠키칼럼]

日 대사관 있는 안국역의 '왜놈 저며 죽이자'
역사는 가슴 아닌 머리로 산 사람이 이겨

기사승인 2022-10-10 06:43:02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충북 괴산 출생으로 건국대 정외과와 같은 대학원 수료(정치학 박사). 건대 정외과 교수, 건국대 중앙도서관장 및 대학원장, 미국 조지타운대학 객원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1999~2000), 국가보훈처 4⋅19혁명 서훈심사위원(2010, 2019),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심사위원 및 위원장(2009~2021) 역임. 
 저서로 '한국분단사연구'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한국사에서의 전쟁과 평화' 등 다수, 역서로 '정치권력론' '한말외국인의 기록 전 11책' '군주론' 등 다수. 
신복룡 교수


[쿠키칼럼]


지난달 27일에 일본에서는 우익의 상징이며, 문벌 정치의 상징인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국장이 있었다. 나는 그의 가문과 한국의 은원(恩怨)을 떠나 한 인간의 귀천 앞에 인생의 무상과 연민을 느끼며 그의 생애를 돌아보는 글을 쓰고자 한다.

일본 막부의 말기, 막부와 존왕파의 갈등이 움틀 무렵인 1842년, 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縣)인 나가토구니(長門國)의 히가시성(荻城)에서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 1810~1876)이라는 인물이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작은 서당을 열었다. 방은 다다미 8폭의 작은 집이었다.

학생은 50~100명이었으며 대체로 80명을 유지했다. 그 정도였으면 분반 학습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타마키의 12세 조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도 있었다.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요시다 쇼인은 1857년에 숙부로부터 이 학당을 인수하였는데 뒷날 메이지(明治) 공신으로 꼽히는 키도 타카시(木戶孝允), 야마카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막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있었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은 막부를 무너트리고 천황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그 밑바닥에는 정한(征韓)의 의지를 깔고 있었다. 그는 페리(M. Pery) 제독의 함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려다 실패한 뒤 양이(攘夷)의 길을 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막부의 핵심 인물인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의 암살을 음모하다가 반역죄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9세였다. 그 밑에서 수학하던 맏형들은 죽음을 피하여 숨어들 때 막내인 이토 히로부미는 목이 잘린 스승의 시체를 껴안고 “선생님의 유지를 제가 잇겠다”고 맹세했다.

요시다 쇼인이 죽고 학당마저 폐쇄되자 그의 제자 가운데 스승의 뜻을 가장 투철하게 이어받은 조슈(長州) 출신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1839~1867)가 암암리에 그 학맥을 이어갔다.

그는 본디 막부의 하급 무사였는데,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의 형세를 파악하고자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서양의 파괴력을 실감하여 존왕양이로 기울었다. 그러나 그는 28세의 나이로 일찍 병사함으로써 요시다 쇼인의 정신이 끊어지는 듯했다.
쇼카 손주쿠(松下村塾)

쇼곤주쿠(松魂塾) 승용차


이어지는 정한론(征韓論)의 뿌리


그 뒤 한 세대가 흘러 같은 야마구치에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가 태어났다. 토쿄(東京)제국대학을 졸업한 그는 상무성에 들어가 두각을 나타내자 곧 만주국 총무처에 부임하여 총무처 차장(1936)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만주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 공로로 상공부로 복귀하여 부대신에 올랐다(1939). 이 무렵 만주국을 이끌고 가는 인물로, 이름의 끝 자가 ○○○스케로 끝나는 세 명의 테크노크래트(3-suke)가 있었는데 바로 기시 노부스케와 만공(滿工)개발주식회사 총재 아유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 1880~1961), 그리고 미국 오레곤대학 출신인 남만철도주식회사[滿鐵] 총재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1880~1946)였다.

이들은 모두 야마구치의 동향 사람으로서 만주가 일본의 생명선이요, 그러자면 그 교량인 조선을 “건너야” 한다는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과 아울러 이들은 모두 일급 전범이었음에도 화려하게 부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종전과 함께 정계를 떠났다가 1955년에 외무대신으로 권토중래했다. 기시는 비서진을 찾던 중, 평소에 눈여겨 보아두었던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정치부의 민완 기자 출신으로 그 무렵에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던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1924~1994)를 발탁했다.

고향 후배에 같은 도쿄 대학 출신인 아베 신타로는 기시 노부스케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아베 신타로의 선조는 조슈 지방에서 간장 공장으로 거부를 이루었고 외조부가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을 진압한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이다. 뒷날 기시는 아베 신타로를 사위로 삼았다.

아베 신타로의 본디 이름은 신타로가 아니었다. 그는 야마구치의 전통에 탐닉했고, 특히 다카스기 신사쿠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그래서 신사쿠(晋作)의 신(晋) 자를 따서 이름도 신타로(晋太郞)로 바꾸었다. 그는 사무라이라면 검법을 알아야 한다면서 검도에도 정진하여 고수가 되었다.
다카스기 신사쿠
(高杉晋作)

그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있다가 갑자기 타계했다. 그런데 여기에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高杉晋作의 이름을 이어받으려면 그 네 글자 가운데 하필이면 晉을 선택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 해답인즉, 晋을 풀어 쓰면 竝日(ならびに にほん), 곧 ‘일본의 운명과 함께 간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베의 정신 : 야마토 다마시(大和魂)


아베 신타로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장남은 정치에 뜻이 없이 사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아베 신조(安倍晋三)이다. 아베 신타로는 둘째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면서 신사쿠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름에 晋자를 넣어 晋三라 지었다.
아베는 결단의 순간이면 고향 야마구치를 찾는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동상 앞에서 그는 무슨 다짐을 하고 있을까. 사진=연합뉴스

그리고 三을 쓴 것은 신사쿠의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를 삼대(三代) 째 이어간다는 뜻을 담았다. 신타로의 셋째 아들인 아베 노부오(安倍信夫)는 외갓집의 양자로 보내어 기시 노부오(岸信夫)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중의원을 거쳐 얼마 전까지 외무성 부대신으로 있었다.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18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왜 이 지나간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하는가? 그것은 현 일본 총리대신 아베 신조의 혼맥(魂脈)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안의 한일 문제를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의 서당인 쇼카손주쿠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지금도 우국 청년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으며, 도쿄 시내를 달리는 택시는 쇼곤주쿠(松魂塾)라고 차체에 글씨를 새기고 달리고 있다. 아베의 정신은 정한론에서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그가 집권하고 있는 한 군대위안부에 대한 사과나 강제 징용의 보상은 없을 것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의 슬라이딩 도어

이런 역사를 모른 채 우리는 전철 3호선 안국역 슬라이딩 도어에 ‘왜놈 저며 죽이자’[屠戮]는 시(詩)를 써 붙이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왜 하필이면 안국역이냐고 알만한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그곳이 일본대사관 승하차 역이어서 일본인이 가장 많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도쿄 신주쿠역 전철이 슬라이딩 도어에 “조센징 찢어 죽이자”는 글을 써 붙인다면 우리의 심정은 어떨까? 외교는 가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결기(決起)와 지모(智謀)와 이해(利害)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는 가슴으로 산 사람이 머리로 산 사람을 이긴 사례가 일찍이 없다.

그런데 지금 한국 외교는 가슴으로 하고 있다. 그것이 안타깝다.

simon@konkuk.ac.kr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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