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 에메랄드빛 버스, 오른쪽엔 어깨에 날개가 돋은 천사 조각상, 반대편을 지키고 선 낡은 회전목마. 그룹 방탄소년단은 15일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연 ‘옛 투 컴 인 부산’(Yet To Come in Busan) 무대에 ‘봄날’, ‘피 땀 눈물’ 등 히트곡 뮤직비디오 속 주요 상징물을 되살렸다. 지난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일까. 혹은 9년간 켜켜이 쌓은 기억이 오늘을 만들었다는 선언일까. 멤버 슈가는 말했다. “이렇게 즐거운 기억을 다 같이 만들었어요. 그게 중요하고 의미 있죠.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나이 들었다고 하지만, 앞으로 20년 30년 더 이 자리에 있을 것 같아요. 같이 늙어봅시다.”
완전체 활동 쉼표…“아쉬움보단 기대와 믿음을”
지난 6월 방탄소년단이 유튜브 채널에 올린 ‘찐 방탄회식’ 영상을 통해 개인 활동에 집중하겠다고 밝힌 뒤 처음 잡은 단체 일정이었다. 제이홉은 “공연을 준비하며 그리움이 울컥 올라왔다”고 털어놨다. 애타는 갈망은 열정을 불태우는 장작이 됐다. ‘마이크 드롭’(MIC DROP), ‘달려라 방탄’, ‘런’(RUN)을 연달아 부르는 사이 정국의 곱슬머리는 땀에 흠뻑 젖었다. 뷔는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열창했고 지민의 격렬한 춤에 그가 입은 셔츠는 허공에서 나풀나풀 춤을 췄다. 랩을 하는 RM의 얼굴엔 때때로 미소가 스쳤다. 슈가는 여유로운 무대매너로 팬들을 안달하게 했다. 무대를 꺼트릴 기세로 춤을 추는 제이홉의 눈빛은 혈기로 이글거렸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정국은 유독 신나 보였다. “나 부산 살았다 아이가!” 그가 이렇게 너스레를 떨자 제이홉은 “마, 쏴라있네(살아있네)!”라고 맞장구 쳤다. 마찬가지로 부산 출신인 지민은 “고향에 아미 여러분을 모시니 더욱 영광이고 설렌다”고 했다. 13일 생일을 맞았던 그는 이날 팬들이 불러주는 축하 노래를 듣더니 “태어나길 잘했다”며 미소 짓기도 했다. 금의환향을 자축하듯 방탄소년단은 이날 ‘마 시티’(Ma City)를 불렀다.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모인 일곱 청년이 “나를 키워준 시티(도시)”를 떠올리며 부르는 고향찬가다. 멤버들이 “자 부산의 바다여, 세이 라라라라”라고 노래하자 5만 관객이 들썩였다. 방탄소년단은 이밖에도 ‘다이너마이트’ ‘버터’ ‘아이돌’ ‘봄날’ 등 20여곡으로 2시간을 채웠다.
부산 공연을 끝으로 방탄소년단은 완전체 활동에 또 한 번 쉼표를 찍는다. 이대로라면 맏형 진은 내년 입대해야 한다. 정치권은 방탄소년단을 내세워 온갖 말들만 주고받을 뿐이다. 이런저런 상황에 심란했을 팬들 마음을 헤아린 걸까. 제이홉은 “하나 된 믿음으로 미래를 그릴 시기”라고 강조했다. 리더 RM도 “우리 앞에 무슨 일이 펼쳐져도 여러분이 우리를 믿어주신다면 굳건히 이겨나갈 것”이라며 “이 순간이 영원할 순 없지만 우리에겐 또 다른 내일이 있다. 아쉬움보단 더 큰 기대를 나눠 갖자”고 말했다. 진은 지난 9월 첫 솔로 음반을 낸 제이홉의 뒤를 이어 솔로 싱글을 낼 계획이라고 깜짝 발표했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분과 인연이 닿아 작업했다. 최근 여러 가지 (콘텐츠를) 찍었고 더 찍을 것도 남았다. 재밌게 봐달라”고 밝혀 팬들을 열광시켰다.
눈길 닿는 곳마다 보랏빛, 새 옷 입은 부산
이번 콘서트는 2030 부산세계박람회(부산엑스포) 유치를 기원하고 세계인들에게 부산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됐다. 방탄소년단이라는 대어를 잡은 부산은 도시 곳곳을 보랏빛으로 물들인 채 방문객을 맞았다. 공연장은 물론, 롯데월드 어드벤처 부산, 광안대교, 영화의 전당 등 부산 시내 주요 랜드마크가 보랏빛 조명으로 빛났다. 부산 대연동에서 만난 토모미(33)는 “어제 일본에서 왔다. 첫 부산 방문인데 도시가 무척 아름답다. 오는 길에 계속 동영상을 찍었다”고 했다. 부산에서 1년 넘게 인턴 생활을 하고 있다는 독일 출신 줄리아(25)는 “부산은 활기찬 도시”라며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해운대를 특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하넬로레 반 데어 슬루이스(20)와 조셀리엔 반 데어 메이(22)는 “해운대해수욕장 백사장에서 실시간 중계로 공연을 본 뒤 광안리에 가 드론쇼를 감상할 예정”이라며 즐거워했다.
전 세계 아미들이 모이자 부산 토박이 아미도 덩달아 신이 났다. 방탄소년단 전시회가 열린 엘시티 앞에서 만난 김예솔(25)씨는 “평소보다 외국인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김윤진(23)씨는 “어제 지하철역에서도 외국인 아미들이 모여 전광판에 나오는 지민의 생일 광고를 보고 함성을 지르더라”고 귀띔했다. 두 사람은 공연 티켓을 손에 쥔 행운아였다. 이들은 “함성을 지를 수 있는 한국 콘서트는 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이후 이번이 처음이라 더욱 신난다”며 설렘을 드러냈다.
다만 잡음도 있었다. 부산시와 하이브는 애초 일광 특설무대에서 10만명(스탠딩 5만명, 좌식 5만명) 규모로 공연을 열 예정이었으나 교통편이 열악하고 안전사고가 우려돼 공연장을 바꾸고 관객 수도 절반으로 줄였다. 이후에는 최소 70억원에 달하는 공연 제작비를 부산시 등이 지원하지 않고 하이브가 전액 부담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부산시가 ‘열정 페이’를 강요했다며 비판받자 하이브는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라며 “비용 문제를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RM은 공연에서 “2019년 매직샵(팬미팅) 이후 3년 만에 부산에서 여는 공연이다. 부산엑스포 유치를 기원하는 자리라 더욱 뜻깊고 영광”이라고 말했다.
부산=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