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1월 의사 오긍선(1878~1963)이 새싹회의 ‘소파상’ 수상식장에서 한 얘기다. 그는 당시 84세의 고령에도 안양기독보육원(현 안양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원장을 맡고 있었다. 1907년 미국 켄터키주 센트럴의대(현 루이빌의대)에서 한국인으로 세 번째로 미국 의사 면허를 받은 뒤 귀국해 군산·목포 예수병원장 등을 지냈고 이후 서울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서 29년간 교수·의사·교장 등으로 살면서 ‘조선의 명의’로 명성이 자자했다. 개화기 선구자였다.
철저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1922년 경성보육원 이사로 참여하면서 조선의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전편("빈민 생활을 탈취하는 의사는 쓸데없다 " 한국식 의료 헌장)에 얘기했듯 미군정의 장관 제의도 “정치는 정치인의 몫”이라며 거절했다. 또 배재학당 3년 선배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 사회부장관, 보건부장관을 맡아 달라고 해도 “관직 주지 말고 고아원이나 좀 도와 달라”며 사양했다.
6·25전쟁 직후 보사부장관과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최재유(1906~1993) 박사의 회고.
“보사부장관 시절 공무로 안양 갔던 길에 불시에 오긍선 선생이 경영하시는 고아원을 방문했어요. 그 더운 여름날인데도 선생께서는 사무실에서 사환 아이 한 명만 두고 영문 타이프를 한 자 한 자 타자하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인사말이었어요.”
단적인 예이나 그의 85년 삶은 ‘시종 소외된 자와 함께’였다.
오긍선은 조선말에 태어나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 군정기, 신생 대한민국이라는 격동기를 살았다. ‘명의’로 호사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성서 말씀을 좌우명 삼아 자손에 본이 됐다.
오긍선가(家)는 지금도 우리나라의 손꼽는 의사 집안이다. 5대째 이어진다. 그의 아들 오한영(1898~1952)이 세브란스의전 교수 시절 일본의 압박에 지쳐 개업 의중을 드러내자 “서양 사람들은 남의 나라 와서 청년 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우리 청년 교육을 외면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개업하겠다는 건 너무 이기적이다”라고 나무랐다.
오긍선의 장손 오중근이 ‘봉사 정신’ 가훈에 따라 개업을 버리고 국립마산병원장, 국립의료원장 등 공직에 몸담았을 때 “조부님께서는 ‘끼니를 굶지 않으면 됐지 의사가 물욕을 바라면 이미 의사가 아니다’라고 하셨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한편 해방이 되고 혼란이 가중되면서 거리에는 고아가 넘쳐났다. 오긍선은 재산을 정리해 서울 ‘경성보육원’(영천시장 뒤편)을 안양역 옆으로 확대 이전해 더 많은 고아를 수용했다. 가건물을 짓고 200여 명을 입소시켰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오긍선은 고아들을 3개 조로 나눠 부산 인근 가덕도(당시 창원군)로 피난시켰다. 1, 2진은 걷고 또 걸어 가덕도에 도착했다. 오긍선도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잤다. 한데 3진 30여 명은 소식이 끊겼다. 미쳐 출발을 못 하고 있을 때 보육원이 폭격당해 숨지고 말았다.
더구나 전쟁 중에 이승만의 간곡한 부탁으로 보건부장관에 임명됐던 아들 오한영도 1년 3개월 만에 과로로 숨졌다. 누구보다 아들의 청렴결백한 공직 수행을 자랑스러워했던 오긍선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어이없는 일들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며 괴로워했다.
‘소파상’ 수상 1년 후 그는 조선의 선비 정신과 기독교 정신으로 일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마쳤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내 이 여관에 와서 오랫동안 신세 많이 졌소.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소.”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