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총사령관 ‘엄티’, 불사를 2023년 [쿠키인터뷰]

돌아온 총사령관 ‘엄티’, 불사를 2023년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3-01-13 06:00:02
10일 성동구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엄티’ 엄성현을 만났다.   사진=문대찬 기자

“노력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노력하는 것 자체에 보람을 느낀다면 누구든지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미소 지을 수 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사상가 톨스토이의 말이다.

‘엄티’ 엄성현이 미소 짓기 위해 브리온으로 돌아왔다. 10일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카페에서 엄성현을 만났다.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암시한 그는 후회 없는 노력으로 스스로에게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털어놨다.

엄성현은 2016년 12월 진에어 그린윙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오랜 시간 정글러로 활동한 베테랑 프로게이머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진에어 그린윙스(해체)와 KT 롤스터, 브리온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팀은 강등권과 하위권에 머물렀다. 

2023년 스프링 시즌을 앞두고 진행된 스토브리그에서는 새로운 팀을 구하기 위해 테스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채 다시 브리온으로 돌아왔다. 이 시간 동안 엄성현은 인생의 가치관과 방향성 등을 놓고 진지한 고민을 이어갔다고 한다. 다시 프로게이머의 길을 선택한 엄성현은 “선수에 대한 열망이 남았다. 최선을 다한 뒤 스스로의 마음을 굳히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후회 없이 불사를 것”이라고 다짐했다.

올해에도 ‘LoL 챔피언스 코리아(이하 LCK)’ 우승컵을 놓고 10개 팀 선수들이 맞붙게 될 가운데, 남다른 출사표를 던진 엄성현 또한 치열하고도 긴 싸움에 뛰어든다. 아래는 엄성현과의 일문일답이다.

Q. 비시즌 기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11월에 팀을 나오고 새로운 팀을 구하려고 했다. 빠르게 팀을 구해 연습에 몰두할 생각이었지만 테스트가 길어졌다. 테스트 이후 새로운 팀을 구할 기회가 적어졌고, 12월이 되자 팀을 구하지 못하는 시즌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혼자 연습하면서 인생의 가치관 등 진지한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Q. 다시 브리온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다른 팀 테스트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 후 먼저 브리온에 연락을 취했다. 당시 브리온으로부터 팀 스쿼드가 구성이 된 상태라고 답변을 받아 어느 정도 포기를 한 상황이었다. 12월 중순쯤 브리온으로부터 팁에 합류할 수 있는지 문의를 받았다. 선수에 대한 열망이 있어서 다시 하게 됐다.

Q. 해설진으로 합류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실제로 해설을 하려고 했다. 새로운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다양한 시각으로 e스포츠 판을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선수로서 확실하게 끝을 보고 싶었다. 끝내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라이엇과의 미팅에서 어떤 상황인지 솔직하게 말씀 드렸더니 관계자 분들께서도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이러한 점들도 마음을 먹는 데 도움이 됐다.

Q. 해외 리그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사실 올해 가장 뛰어보고 싶었다. 나이나 경기력 등을 고려했을 때 해외에 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잘 성사되지 않았다. 이제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인터뷰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엄성현.   사진=문대찬 기자

Q. 새 시즌 준비, 달라진 마음가짐은 무엇인지?

가치관에 대한 재정립을 많이 했다. 1년을 갈아본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 지금처럼 열심히 한 적이 데뷔 이후에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끝까지 해보고 그래도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다고 느껴지거나 누군가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 고민을 해볼 것 같다.

Q. 어떤 가치관을 재정립했나?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고 나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팀이 잘 안되고 천천히 생각해 보니까 처음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정말 초심은 부스에서 게임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내가 처음 데뷔했던 시기에는 선수들이 부스에 들어가서 게임을 했다. 

초창기에는 부스에 들어가서 경기를 뛰는 것 자체가 목표였지만 어느덧 목표가 너무 높아졌다. 욕심을 부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한 점을 깨닫고 나니까) 이제 좀 편해졌다. 매 경기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 같다. 더 진심을 다할 수 있게 됐다.

Q. 스토브 리그가 달라진 가치관에 영향을 줬는지 궁금하다.

분명히 있다. 결국 팀을 못 구했지만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됐다. 이 기회를 잡은 시점은 가치관이 점점 변경되고 있던 시기였다. 초심을 되찾고 나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걸 깨달았다. 올해를 한 번 불태워 볼 생각이다. 한계에 부딪히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다. 선수로서 이런 생각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번 연도에 확실하게 해보려고 하는 것 같다.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Q. 자신의 근거는?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면서 지금처럼 빠른 성장을 이룬 적이 없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이제는 스스로를 믿고 있다.

Q. 최우범 감독의 영향도 있다고 보는지.

최우범 감독, 이승후 코치를 비롯해 선수들 전체적으로 믿어주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개인적으로는 마인드가 정말 나쁜 선수가 아닌 이상 성장하지 않기가 어렵다고 본다. 서로를 탓하거나 감정이 쌓이는 분위기가 아니라 서로 간에 어떻게 하면 발전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서로가 성장할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 같다.

Q. 본인과 팀이 ‘약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경기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언더독을 자처하는 이유는?

처음 데뷔했을 때는 자신만만한 시기가 있었다. 난 잘한다는 치기 어린 생각. 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기를 치를수록 이런 생각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성장할 수 있어야 더 잘해진다는 것을 알게 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위치를 인정하고 배우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또 일종의 생존본능인 것 같다. 솔직히 처절하게 발악했다고 해야 될까, 사람은 진화한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진화한 것 같다. 다른 선수에 비해 재능이 엄청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노력이나 발상의 전환에 대한 재능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으로라도 다른 선수들과의 격차를 줄이고 싶다. 그렇게 해서 끝까지 가보고 싶다.

Q. 다른 선수들로부터 배운 점은?

정글러 ‘오너(문현준·T1)’의 예를 들면, 공격적인 플레이를 선호하고 챔피언 자체도 공격적인 챔피언을 잘 다룬다. 피지컬적인 부분을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없겠지만 언제 강하고 언제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지 등의 큰 틀은 따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를 알면 한 발 나아가 반대로 이용할 수도 있다. 상대가 강한 타이밍에 들어오는 것을 역이용해 오히려 이득을 낼 수도 있다.


시즌 중 경기에 임하고 있는 엄성현.   쿠키뉴스DB

Q. 베테랑 선수들의 롤드컵 결승전을 본 소감도 남다를 것 같다.

‘페이커(이상혁·T1)'와 ’데프트(김혁규·DK)'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두 선수는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시기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을 탓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신체적인 한계에 부딪혔을 수도 있다. 이런 과정들을 극복한 두 선수가 롤드컵 결승전 무대에서 끝까지 하고 있는 모습이 멋있다고 느꼈다. 두 선수는 존경받아야 된다고 본다.

Q. 김혁규의 우승을 보며 우승에 대한 열망도 느꼈는지?

항상 있다. 2018년에 LCK 결승전 직관을 간 적 있다. 현장에서 보는 게 정말 분하고 힘들었다. 한 번 보고 절대 경기장에 가지 않는다. 결승전을 보면 확실히 열망도 생기고 차오르는 부분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본다면 아직 너무 먼 이야기인 것이 맞다. 끌어 오르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하려고 한다. 조급하면 될 것도 되지 않는다.

Q. 본인도 힘들거나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정말 힘든 순간은 있었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다. 이 부분은 스스로도 신기하다. 

Q.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이유는? 

(이유가)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어린 시절에는 이거밖에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뭘 할 생각인지도 있었다. 나중에 가면 갈수록 여기까지 왔는데 끝은 좀 봐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힘든데 재밌다. 이 순간이 너무 즐겁고 언젠가 이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추억이 되는 것을 깨달았다. 게임도 재밌다. 

Q. 잘 만든 게임인 걸까.

‘갓겜’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감정을 뒤흔드는 게임.

Q. 어떤 선수가 되고 싶은지?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고 싶다. 저를 낮추는 것 같지만 예를 들면 ‘나 같은 선수도 10년을 뛰고 있으니 너도 할 수 있다’거나 ‘나도 하다 보니까 결국 됐다’처럼 어떤 오명을 듣더라도 결과는 좋으니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후배들에게 이러한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싶다.

미소 짓는 엄성현.   사진=문대찬 기자

Q. 프로를 계속하고 싶으면서, 은퇴를 암시하는 이유는? 리그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상황을 염두에 둔 건가?

그런 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한계를 느끼게 된다면 다른 직업으로 전향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올해 최선을 다해보고 스스로 마음을 굳히고 싶다.

Q. 프로게이머 이후의 단계도 고민 중인지.

그 고민은 모두 불사르고 끝나면 생각하겠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생각이 추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하고 싶지 않다.

Q. 올해 각오가 남다르다. 스프링 스플릿은 어떤 각오로 임할 것인지?

성장이 포커스다. 팬분들께 죄송한 말이지만 브리온은 페널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팀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급하게 불려왔다. 외부 시선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스크림에 늦게 합류를 했고 실제로도 스크림에서 많이 지고 있다. 성적보다는 천천히 맞춰나가고 결국 성장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폼이 빠르게 올라올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이다.

Q. 새로워진 브리온의 팀 컬러는?

사실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선수들이 더 믿어주는 것이 느껴진다. ‘딜라이트(유환중·젠지)’나 ‘라바(김태훈·LOS)’는 자신의 컬러가 뚜렷한 선수였다. 선수들의 플레이에 맞춰서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새로운 멤버들은 서로를 잘 믿어주는 팀이다. 한 선수가 못하더라도 ‘우리는 너희를 대체할 자원이 없다. 지지고 볶더라도 끝까지 잘해야 된다’는 팀 색깔이 있다.

Q. LCK 스프링 스플릿, 브리온과 엄성현의 목표는?

브리온의 목표는 잘 모르겠다(웃음). 하지만 개인적인 목표는 부스에서 게임을 하고 싶었던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또 선수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 지금은 같은 팀 팀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

Q.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린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한 것 같아 죄송하다. 제가 다시 돌아와서 좋으신 분도 계실 것이고 ‘랩터(전어진·브리온)’ 선수의 팬이라면 저를 싫어할 수도 있을 것 같다(웃음). 선수들 잘 챙기고 시즌 열심히 준비해서 팬분들께 ‘브리온스러운’ 경기력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브리온 엄티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2023년, 후회 없이 불사를래요.” | 쿠키뉴스

성기훈 기자 misha@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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