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이해영 “항일 운동을 장르 영화로” [쿠키인터뷰]

‘유령’ 이해영 “항일 운동을 장르 영화로”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3-01-26 06:00:27
영화 ‘유령’을 연출한 이해영 감독. CJ ENM

“유령에게 고함. 작전을 시작한다. 성공하기 전까지는 멈춰서는 안 된다.” 지난 18일 개봉한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은 작품에 나오는 이 문구와 닮았다. 자처해서 어려운 길로 돌진하는 점이 그렇다. 중국 소설 ‘풍성’을 각색한 ‘유령’은 첩보물과 액션물을 접붙여 독특한 색깔을 낸다. 16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해영 감독은 “영화를 본 지인들이 이해영 감독의 인장이 선명하다고 말해줘 고마웠다”면서 “첩보 액션이라는 장르를 즐기면서 작업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기사에 ‘유령’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Q.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처음 작품을 제안 받았을 땐 막막했다’고 말했다.

“원작 소설은 밀실추리극이다. 비슷한 플롯을 가진 명작이 워낙 많아서 선뜻 작품을 집어 들지 못했다. 고민 끝에 발상을 전환해서 유령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열면 색다른 장르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작과 멀어지겠다는 목표를 세우진 않았지만, 결과를 보니 원작과 사뭇 다른 결로 완성됐다.”

Q. 원작 ‘풍성’은 중국이 배경이다. 장소를 조선으로 옮기면서 달라진 점이 있나.

“우리 역사에서 뿌리를 찾아 영화와 연결하는 것이 첫째였다. 실존했던 항일 조직 흑색공포단(남화한인청년연맹)을 씨앗으로 삼았다. 흑색공포단은 1933년 육삼정 의거(중국 주재 일본공사를 살해하려 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를 벌였다. 성공하진 못했으나 누군가 그들의 정신을 물려받아 투쟁을 이어간다고 설정했다.”

‘유령’ 속 배우 이하늬. CJ ENM

Q. 이하늬는 영화 ‘극한직업’(감독 이병헌)이나 SBS 드라마 ‘원 더 우먼’ 등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차경(이하늬)의 뒷모습이 영화 첫 이미지였다. 의지할 수 있는 단단한 뒷모습. 거기서 배우 이하늬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오랜 팬으로서 본 이하늬는 사사로운 것에 흔들리지 않고 강단 있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정갈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계승해 박차경의 토대를 만들었다.”

Q. 유리코를 연기한 박소담과는 영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이후 두 번째 협업이다.

“배우 박소담에게 ‘미친 에너지를 뿜어보자’며 시나리오를 줬다. 도발하고 발산하고 찢는 역할을 주고 싶었다. 박소담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대본리딩 때부터 신뢰를 줬다. 다시 만나니 ‘괄목하다’는 표현 이상으로 성장해 있더라. 작은 도약대 하나를 줬을 뿐인데도 훨훨 날아다니며 맹렬한 연기를 보여줬다.”

Q. 시나리오를 쓰면서 상상한 이미지가 정확하게 구현된 장면, 시나리오 집필 당시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각각 꼽는다면.

“이하늬는 내가 상상한 이미지를 충실하고 완벽하게 구현해줬다. 반대로 설경구 선배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 순간을 만들어줬다. 쥰지(설경구)가 자조하고 자학하듯 연설하는 장면이 그렇다. 촬영 당시 엄청난 걸 목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이토 역의 박해수는 본능적으로 연기한다. 아주 짧은 순간 경멸, 조소, 증오가 휙휙 지나갔다. ‘네 얼굴에 방금 우주가 지나갔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유령’에서 천은호 계장을 연기한 배우 서현우. CJ ENM

Q. 서현우가 맡은 천은호 계장은 무척 사랑스럽다. 그를 어떻게 퇴장시킬지도 고민이었을 것 같다.

“사랑스러움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빼버리려고 했다. 영화가 앞으로 돌진하려면 그때 나오는 텐션(긴장감)이 필요하다고 봤다. 캐스팅 당시 서현우가 tvN ‘악의 꽃’에 출연하며 체중을 줄였을 때라 출연을 제안하기 조심스러웠다. 영화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을 위해 살을 찌웠다기에 ‘예쁘게 통통해진 김에 이 작품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비록 지금은 다시 살을 뺐지만… 관객들이 통통한 서현우의 아름다움을 널리 이야기해주길 바란다.(웃음)”

Q. 혈통에 콤플렉스를 가진 쥰지와 달리, 차경과 유리코의 전사는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쥰지의 마지막 연설이 비극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태생적인 딜레마를 설정해야 했다. 박차경과 유리코의 경우, 관객이 유추할 공간을 남기려고 했다. 그래야 관객이 캐릭터에 가깝게 다가올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특히 차경을 움직인 사랑이 무엇인지가 쉽게 규정되지 않길 바랐다.”

Q. 캐릭터들이 심리전을 벌이는 호텔은 어떻게 설계했나.

“지형이 첫째였다.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어야 해서 서해 절벽 위 어딘가의 호텔로 설정했다. 인물들이 충돌하고 교란하고 부딪치는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공간이 반짝이고 안락해야 했다. 아름답지만 위협적이고, 깨질 것 같은 불안함이 공존하는 곳이길 바랐다. 장르가 바뀌고 악역들이 민낯을 드러낼 때부턴 질감과 색감 등 모든 것이 정반대되길 원했다. 질척대고 더럽고 야만적인 곳으로 지하층을 설계했다.”

‘유령’ 속 배우 설경구. CJ ENM

Q. 쥰지의 가죽 재킷이나 호텔 벽지 등에서 녹색을 자주 사용했다.

“녹색과 붉은색이 자주 대비된다. 뉘앙스를 위해서였다. 가령 사이렌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가 붉게 물든다. 공간이 전복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차경은 무채색에 가깝지만 짙은 자주색 코트를 입어 죽지 않은 상태를 표현했다. 쥰지도 녹색 재킷 안에 붉은 조끼를 입는다. 재킷은 가죽 재질이라 빛에 따라 색깔이 달라 보인다. 갑옷처럼 사람을 가두는 느낌이지만 자유롭게 펄럭댈 수 있어서 다중적인 뉘앙스를 준다.”

Q. 항일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특유의 뜨거움을 어떻게 반영하려고 했나.

“대의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사람들 이야기다. 거기에서 오는 뜨거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하지만 대의라는 개념이 캐릭터 개개인에게 사적인 감정으로 가깝게 다가가길 바랐다. 박차경이 안온한 삶을 벗어나 다른 인생을 향하는 데는 아주 사적인 감정이 작용했으리라 봤다. 태생과 환경을 거스르게 할 정도로 절실한 감정은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Q. ‘밀정’(감독 김지운), ‘암살’(감독 최동훈) 등 항일 운동을 소재로 한 다른 상업영화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나.

“다른 영화와 일부러 거리를 두거나 참고한 것은 없다. 다만 그런 훌륭한 영화들이 흥행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장르 영화로 풀어내고 받아들일 감수성이 생겼다고 본다. 장르 특성이 살아나도록 연출할 바탕이 되어준 작품들이다.”

Q. 차기작은 정해졌나.

“놀랍게도 차기작을 이미 써놨다(웃음). 키워드는 알려줄 수 없다. 하하. 전작과 전혀 다르지만 이해영스러운 어떤 것은 있다. 어떤 장르와도 닮지 않아서 새로운 작품일 것 같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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