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사고에도 ‘부어라 마셔라’… 출발은 스무 살

음주 사고에도 ‘부어라 마셔라’… 출발은 스무 살

기사승인 2023-04-20 13:00:45
쿠키뉴스 자료사진

# 음주운전 차량이 길을 걷던 9~12세 초등학생들을 덮쳤다. 지난 9일 대전 둔산동 한 스쿨존에서 벌어진 일이다. 친구들과 조금만 더 놀겠다던 아홉 살 어린이가 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3명도 부상을 입었다. 1명은 뇌수술을 받았고 1명은 실어증, 1명은 후유증을 앓고 있다.

3081명. 2020년 한 해 국내에서 음주운전 사고로 발생한 사망자 숫자다. 매년 3000명이 넘는다. ‘민식이법’ ‘윤창호법’ 등 음주운전으로 사망하는 피해자가 발생할 때마다 법이 개정됐다. 그런데도 또 9살 어린이를 잃었다. 며칠 뒤엔 출근하던 20대 사회초년생이 음주운전 사고로 의식불명에 빠지는 일이 발생했다. 전 국민이 매번 분노하고, 매번 음주운전 처벌법 강화를 외친다. 여전히 퇴근길에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전 국민 10명 중 7명은 술이 1급 발암물질에 속한다는 사실을 모른다.(2023 국립암센터 ‘대국민 음주 및 흡연 관련 인식 조사’) 술은 음주운전, 알코올 중독, 주취 폭력 등의 위험성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친구 같은 존재다. 잘못된 음주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걸까. 스무 살이 되면 당연하게 술부터 마시는 한국 사회의 음주 풍경을 들여다봤다.

20세, 음주 첫 시작

이선우(22·남·대학생)씨에게 스무 살이 된 2021년 1월1일은 친구들과 모텔에서 모여 처음 술을 마신 기억으로 남아있다. 코로나19 여파로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았기 때문에 방을 잡아야 했다. 이씨는 “이제 성인으로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면서도 “이제 학생이 아니라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매년 12월31일 저녁이면 열아홉 살 청년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들의 발길은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 1월1일 0시 새해 종이 울리면 주민등록증을 내밀고 술집에 들어가는 건 이제 매년 반복되는 문화다. 성인이 된 첫날부터 술을 마시려는 청년들이 2~3시간 전부터 줄을 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전국 곳곳에서 펼쳐진다.

유튜브에 ‘첫 음주’를 검색하면 스무 살이 된 첫날 술을 마시는 브이로그가 줄지어 나온다. 한 유튜버의 스무 살 음주 브이로그 영상은 조회수 200만을 넘겼다. 해당 영상에는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는 내용의 댓글이 수십개 달렸다. 연령대에 따라 댓글 반응이 갈린다. 성인들은 “스무 살 딱 처음 됐을 때 그 감정이 느껴진다”며 과거를 회상하고, 미성년자들은 “빨리 스무 살이 됐으면 좋겠다. 그 분위기가 기대된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첫 음주가 스무 살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축제이자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빈 술병이 가득한 술집 풍경.   조유정 기자

26세, 사회생활 속 음주

3년 전 처음 출근한 김모(30·남·회사원)씨에게 직장 상사는 “술은 좀 마시나”라고 물었다. 과거 술을 마시고 기절한 경험이 있는 김씨는 “체질상 술을 못 마신다”고 답했다. 상사의 표정에서 실망이 엿보였다.

20대 중반을 넘어서면 술을 마시는 이유가 친목에서 사회생활로 바뀐다. 친한 친구·가족과 자유롭게 마시던 것과 달리, 필수로 술을 마셔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술을 억지로 강요하는 문화가 많이 사라졌다지만, 학교나 회사에서 왠지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있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면 괴로운 상황이 펼쳐진다. 조모(26·여·회사원)씨는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회생활을 위해 마셔야 했다”고 토로했다. 주량이 늘어나기도 한다. 최모(30·여·회사원)씨는 “취업 후 일주일에 세 번씩 술자리에 가야 했다”라며 “원래 소주 반병도 마시지 못했는데, 직장 생활을 하며 1병 이상 마시게 됐다”고 말했다.

40세,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김도형(41·남·회사원)씨는 20대 초반 술을 마시다가 몰래 화장실에서 토한 걸 숨긴 기억이 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걸 친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사회초년생 시절 술을 잘 못 마신다고 하면 선배들이 술자리에 부르지 않을까 봐 억지로 마신 일이 많다”고 털어놨다.

기성세대에겐 20대 시절 겪은 술에 얽힌 악몽 같은 기억이 하나씩 있다. 주량을 넘겨 더이상 먹기 싫어도 선배의 강요로 술을 마신 기억도 많다. 그럼에도 대부분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도 음주를 하겠다고 답했다. 정모(38·여·회사원)씨는 “20대 초반엔 주량을 넘겨도 마셔야 할 때가 있어 힘들었다”라며 “술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도 마실 것 같다”고 했다.

20대 시절과 달라진 점도 있다. 전과 달리 음주량을 조절하고 싶다는 반응이 많았다. 김모(45·남·회사원)씨는 “과거 술을 컨트롤하지 못해 대학 과제나 시험에 불성실했던 경험이 있다”며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면 건강이나 생활 등을 생각해 현명하게 조절하며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김모씨(41·여·주부)는 “과거엔 분위기 때문에, 주목받으려고, 어울리려고 내 주량과 상관없이 마셨다”라며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면 내 건강과 마음에 따라 음주량을 조절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소년 음주율 그래프. HP2030 팩트시트

13세, 낮아지는 첫 음주 연령

술을 접하는 연령대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한국 청소년이 처음 술을 접하는 시기는 평균 13세. 교육부와 질병관리청이 지난해 실시한 ‘학생 건강검사 표본통계’와 ‘청소년 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8명 중 1명이 술을 마시는 것으로 조사됐다. 음주 청소년 비율은 1년 새 21.5% 증가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위험 음주’를 즐기는 청소년도 5.6%로 조사됐다.

이해국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코로나19의 영향이 크다”고 분석했다. 이 이사장은 “코로나19로 홈술이 문화가 되며 부모님이 집에서 술을 마시고, 음주 콘텐츠가 늘어났다”라며 “이는 어른들의 행동을 따라 하고 싶은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그룹 블랙핑크 지수가 출연한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이 공개 11일 만에 조회수 1364만 뷰를 기록했다. 유튜브 캡처

2023년, 음주 권하는 미디어

코로나19 이후 술을 소재로 활용하는 콘텐츠가 크게 늘었다. 지난해 방송된 티빙 ‘술꾼도시여자들’은 술로 인해 발생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공개 당시 티빙 유입률 32.8%를 기록하며 시즌2까지 나왔다. 래퍼 이영지의 유튜브 채널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도 게스트 1명이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음주 콘텐츠로, 지난 18일 기준 구독자 255만명에 최고 조회수 1345만을 기록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2021년 방영된 TV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지켜본 결과, 1편당 음주 장면이 평균 2.3회 송출된 것으로 조사됐다.

TV에 모자이크로 등장하는 담배와 달리, 같은 1급 발암물질인 술을 마시는 장면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전문가들은 미디어가 청소년의 음주를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서미선 중독전문 사회복지사는 “미디어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은 청소년의 음주를 조장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서씨는 “사실 소주 광고도 타깃은 청소년”이라며 “나이 든 사람은 광고하지 않아도 알아서 마신다”고 꼬집었다.

연예인들이 술을 마시고 광고하는 현상이 청소년들의 모방심리를 자극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해국 이사장은 “아이돌이 주류 광고를 하고 방송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술을 미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프랑스, 영국 등 해외에서는 연예인의 주류 광고를 금지한다”며 “한국도 주류 회사의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유정 기자 youjung@kukinews.com
조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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