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에 ‘콘크리트 유토피아’ 주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폭탄머리에 초점 흐린 눈동자, 의지라곤 하나도 없어 뵈는 무기력함.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에서 배우 이병헌이 연기한 김영탁은 한 마디로 독특하다.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그의 희생정신을 추켜세우며 주민대표 자리를 권한다. 얼떨결에 감투를 쓴 영탁은 조금씩 달라진다.
영탁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최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그를 연기하는 일이 어려웠다고 돌아봤다. 이병헌에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시작 전부터 재미났던 작품이다. 대지진으로 모든 게 무너진 상황에서 우리 아파트 하나만 남아있다는 설정부터 끌렸단다. 이후 받아본 시나리오는 기대 이상이었다. 극단적인 현실에서 절대 선, 절대 악도 아닌 인물들은 저마다 상식선에서 행동한다. 생활규칙을 정하며 낙원 만들기에 여념 없지만 그 안에서 갈등은 무럭무럭 피어난다. 이병헌은 “이 영화에서 재난보다 무서운 건 인간”이라면서 “인간성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만의 재미”라고 말했다.
이병헌은 엄태화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영탁에 살을 입혔다. 앞서 열린 언론 행사에서 감독이 “단편적이던 영탁이 이병헌을 만나 입체적으로 바뀌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다. 이병헌은 영탁을 “패배 잦던 인생, 우울한 현실에 놓였지만 어디까지나 상식선상에 있는 인물”이라고 봤다. 예상치 못한 신분 상승을 이뤄낸 영탁은 권력에 취하며 차츰 변화한다. 연기하는 맛이 쏠쏠했지만, 영탁을 이해하는 과정은 다소 지난했다.
“겪어본 것을 표현할 땐 자신 있는 반면, 경험해보지 않은 감정을 연기할 땐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영탁은 후자였죠. 이럴 때면 저를 설득하는 과정이 먼저예요. 나 자신이 납득하고 이해해야 연기할 수 있으니까요. 이번 작품은 설득당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영탁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소화전 장면이 특히나 그랬어요. 간절함이 느껴지는 주문이라는 게 쉽사리 와닿지 않더라고요. 이외에도 ‘창자까지 내뱉을 정도로 포효하다 구역질한다’는 지문이 있었어요. 이 순간에 영탁은 왜 그랬을까 고민했죠. 내가 설득당한 내용들을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방안을 고민하곤 했어요.”
이병헌은 감독을 설계자로 표현했다. 장면에 맞는 감정을 찾아가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감독의 설계가 가장 빛난 부분은 마을잔치 신이다. 영탁의 표정과 함께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지는 이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이를 연기한 이병헌은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내가 느낀 정서를 관객에게 전할 수 있을지” 우려해서다. 그럴수록 이병헌은 그간의 경험에 기댔다. 캐릭터에 젖어들어 비로소 동정에 이르는 순간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단다. 이성을 놓을 정도로 분노한 영탁의 감정과 공명하자 그의 머릿속에서 영탁이 선명해졌다.
“첫 등장 때만 해도 영탁은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절망 끝에서 무기력하게 숨만 쉬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불난 집을 보고 무의식중에 뛰어들죠. 그에게 아파트란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니까요. 어리숙한 영탁이 달라지는 건 주민회의부터예요. 부녀회장이 세상이 달라졌다며 ‘살인범이나 목사나 이제는 같으니 여기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하거든요. 그때 표정 변화 없이 새로운 현실을 인지했다는 뉘앙스만 전달하려 했어요. 제가 아이디어를 낸 부분도 있어요. 평생을 모씨로만 살았으니 이름을 미음부터 쓰는 게 당연하잖아요. 지금 자신은 김씨로 살고 있는데도요. 그래서 감독님에게 버릇처럼 미음을 적다가, 아차 싶어 ‘ㄱ’과 ‘ㅣ’를 서둘러 쓰면 어떨지 제안했죠. 가장 큰 쾌감을 느꼈던 장면이에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얼렁뚱땅 말하는 장면 역시 애드리브였어요.”
이병헌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촬영하는 순간과 결과물까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모든 게 좋았다고 재차 말했다. 간만에 스크린에 걸린 블랙코미디 장르다. “인물 관계가 서로 상충하며 변화하는 과정”은 그가 꼽은 주안점이다.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점만 보이더라”며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 “감정 이입할 인물이 보는 사람마다 다른 영화예요. 그 점에 주목하며 관람해 주세요. 모든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길 바랍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