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망신, 언덕에서 구른 내 친구 골든레트리버

개 망신, 언덕에서 구른 내 친구 골든레트리버

[지리산웰빙팜] 농사꾼 임송의 귀농일기(34)
반려견 '세로' "자네는 내 주인이 아닐세"

기사승인 2023-10-01 12:00:02
최근에 과거에 썼던 글을 정리하다가, 재미있는 글이 있기에 옮겨 적는다. 10년 전, 같이 살던 반려견 ‘세로’(골든레트리버)가 내 팔뚝을 문 사건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된 문건이었다.

한가하게 주말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마당에서 세로가 고통스럽게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잘 못 듣던 소리라 놀라서 나가보니, 세로가 쓰레기 더미에 있던 돼지 껍데기(15㎝ 정도 되는)를 주워 먹다가 목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소리였다.

나는 잠깐 지켜보다가 혼자서는 해결을 못 할 것 같아 도와주려고 다가가는 순간 세로가 갑자기 몸을 뒤틀면서 내 팔뚝을 물었다. 사실 세로가 나를 문 것인지 아니면 고개를 돌리다가 이빨이 내 팔뚝에 닿아 상처를 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내숭 '세로'. 카메라 앞이라고 점잖 빼고 있다. 사진=임송 제공

어쨌든 덩치가 큰 놈이 낸 상처라 찢어진 부위가 크고 깊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자 세로도 놀란 듯 내 옆에서 배를 보이며 몸을 발랑 뒤집었다.

아마도 자신이 일부러 한 것이 아니라는 의사표시 같았다. 이후 병원 응급실에 가서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주사도 맞았다(참고로 개에 물린 상처는 부위가 다소 크더라도 잡균 감염 등을 우려해 당장 봉합하지는 않는단다).

이후 나와 세로의 관계는 예전과 달라졌다. 그전에는 서로 거리낌 없이 지냈는데 한번 사고가 나자 서로를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도 세로 가까이 가려면 다소 주저하게 되고, 세로도 행여 보복이라도 당할까 봐 나를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오늘 발견한 글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세로의 입장이 돼서 쓴 글이었다.

거기에는 ‘세로의 변’이라는 제목이 달려있었다.

“먼저 며칠 전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해 유감의 뜻을 밝힌다. 내가 내 주인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이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는 오랫동안 폭력이 문제해결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확고히 해왔으며 일관되게 다른 종족들과의 평화를 추구해 왔다.

이 점은 그동안 우리 종족(골든레트리버)이 인간들을 위해 헌신해 온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우리는 인간들이 같은 종족을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멸시할 때 스스로 나서서 이들의 안내견 노릇을 해왔으며, 친구가 필요한 고독한 인간들을 위해 자존심 버리고 애완견 노릇을 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한시도 자존심을 버린 적이 없다. 인간들은 스스로 우리의 주인을 자처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주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들은 단지 친구일 뿐이다.

자연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과 우리 종족 간에 어떻게 주인과 종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단지 친구일 뿐이다.

혹자는 인간이 우리에게 집과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것을 이유로 주종관계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속 좁은 인간들의 미개한 견해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대자연의 일부로서 산과 들에서 평화롭고 안락하게 부족함 없이 살았다. 가끔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일시적으로 쪼들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의 숙명으로 우리가 자유를 포기할 이유는 아니었다.

우리가 인간 곁에 온 이유는 인간에게 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존재를 위해 우리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태도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이익이나 편리를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요원한 평화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기의 것을 내놓지 않는 대의는 허망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며칠 전에 있었던 사고는 이러한 인식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친구와의 사소한 마찰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작은 불상사가 있었다. 친구를 다치게 한 점은 내 불찰이다.

나는 단지 친구에게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친구가 나를 제압하려고 했고 약간 화를 내는 과정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

그리 큰일도 아닌데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친구는 이 사고를 제법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친구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게 자네는 내 주인이 아닐세.”
‘세로’(오른쪽)는 10년 전에 사고로, ‘가로’(왼쪽)는 작년에 병으로 죽었다. 의리 없는 놈들. 사진=임송

세로는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로 먼저 갔다. 세로를 보내고 나는 마음이 허전하여 한동안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마음으로 세로와 대화를 시작했다.

먼저 세로의 입장이 되어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하고, 다음으로 내가 세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원 없이 했다. 그러고 나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면서 인제 그만 세로를 보내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잠도 잘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뚱뚱했던 세로가 별로 높지 않은 언덕배기를 오르다가 뒤로 굴러떨어지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개가 저걸 못 올라가고 뒤로 굴러떨어진담.”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jirisanproduce@daum.net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