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도 좋고, 책도 좋아”…‘음주 독서’에 취한 청년들

“술도 좋고, 책도 좋아”…‘음주 독서’에 취한 청년들

기사승인 2023-11-04 06:00:24
술과 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서울 합정동 한 북 바. 사진=유채리 기자


최근 조용하게 책을 읽으며 술 마실 수 있는 가게들이 늘어나고 있다. 청년들에게 음주 독서는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소비 문화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음주 독서’나 ‘북 바(책(book)과 바(bar)의 합성어)’는 이미 SNS에서 인기 많은 키워드다. 5000여개 이상의 게시물에서 술을 마시며 책을 읽은 청년들이 인증샷을 남겼다. 책과 맥주의 합성어인 ‘책맥’을 검색하면 2만5000개 이상의 게시글이 뜬다. 독립서점 사이트 동네서점에서 검색한 결과, 서울에 등록된 독립서점 261곳 중 술을 파는 곳은 27곳이었다. 이 중 8곳은 최근 3년 이내로 생긴 곳으로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30일 오후 6시쯤 방문한 서울 합정동 한 북 바는 흔히 가는 카페나 바와 조금 달랐다. 벽 한 면에 위스키와 책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나무 테이블은 혼자나 둘이 앉는 작은 크기였다. 자리마다 따뜻한 색의 조명이 불을 밝혔다. 시간이 흐르자, 한두 팀씩 조용히 사람이 늘어났다. 모두의 손엔 책이 들려 있었다. 편안한 인디음악이 흐르고, 대화 소리는 작았다.

메뉴판에서 브랜디를 주문하자 시집이 같이 나왔다. 브랜디의 색과 시집 표지의 색이 같았다. 평소보다 책에 집중이 잘 되는 느낌이었다. 다른 장소와 달리, 책을 읽으러 왔다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습관적으로 보던 휴대전화도 그곳에선 멀리하게 됐다. 다른 사람들 모두 책을 읽고 있는 모습도 집중을 도왔다. 술을 마실수록 몸이 이완돼 긴장이 풀렸다. 스스로를 위해 좋은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에 만족감이 컸다.

이미 음주 독서를 익숙하게 즐기는 청년들이 많았다. 이날 북 바에서 만난 김연진(24)씨는 “술 마시며 책 읽는 걸 즐긴다”라며 “술 마시며 책 읽을 수 있는 가게를 찾아다닐 때도 있다. 오늘 이곳도 일부러 찾아보고 왔다”고 했다. 성모(34‧직장인)씨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책과 함께 술을 즐긴다”라고 말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음주 독서 후기를 묻고 답하는 게시물이 종종 올라온다. “소설에 몰입이 잘될 때가 있다”거나 “책 읽기 전에 눈물 주룩주룩 흐를 걸 대비해”라는 후기 댓글들이 달렸다. 책 읽으면서 술 마시는 것을 추천하며 “(이런) 꿀조합이 널리 알려졌으면”이라고 바라는 반응도 눈에 띄었다.

북 바에 들어서자 벽 한면을 채운 책장이 먼저 눈에 띈다. 사진=유채리 기자


“가장 확실한, 날 위한 시간”

음주 독서를 즐기는 청년들은 술이 책에 더 집중하게 한다고 말한다. 몸을 이완시키는 술과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책이 언뜻 상극처럼 보이는 것과 다르다. 정다은(24)씨는 “시나 에세이 책을 읽을 때는 음주가 감정을 더 증폭시키는 듯하다”라며 “하지만 인문학이나 경제학 분야의 책을 술과 함께 읽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북 바에서 근무하는 카야(활동명)씨 역시 “술을 마시며 시를 읽을 때, 내용이 더 잘 와 닿거나 해석이 잘될 때도 있다”라며 “각 잡고 지식을 습득하는 독서도 있지만, 취미나 하루를 마무리하는 느낌의 독서도 있다. 그럴 때 잘 어울린다”라고 덧붙였다.


나를 위해 좋은 시간을 보내는 느낌도 음주 독서의 장점이다. 집과 다른 분위기의 정돈된 가게에서 술 마시며 책 읽는 건 새로운 느낌을 준다. 김연진씨는 “북 바에선 카페보다 책을 좀 더 여유롭게, 집중해서 즐길 수 있다”라며 “나처럼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점이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음주 독서를 취미로 삼는 것이 자신의 취향을 부각하려는 청년들의 특성을 반영한 결과란 분석도 나온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음주 독서는 책과 술 모두를 통해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추구할 수 있다”라며 “관계를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을 자신에게만 쏟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역시 “음주 독서는 개인의 취향, 차별점을 부각하려는 청년세대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동시에 개인적인 만족감도 추구할 수 있는 행위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이 교수는 “미래가 불확실한 청년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가장 확실하게 노력하는 시간”으로 음주 독서를 정의하기도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필연적으로 말을 하고 들어주며 관계를 위한 행동과 에너지가 수반되는 것과 달리, 그 시간에 자신에게 집중하고 삶을 관리한다는 의미다. 이어 “혼자 마실 때는 술 조절이 어렵다”며 “지나치게 과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유채리 기자 cyu@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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