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르네상스 이래 서양 미술의 근간으로 여겨지던 원근법을 해체하여 공간의 단일성 무너뜨린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창의적인 그림이다. 물론 일본 목판화인 우끼요에의 영향으로 평면적이고 장식적으로 공간을 빼곡히 채워 넣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많이 그려지던 둥근 화폭인 톤도(Tondo)를 연상시키는 원 안에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의 독특한 전통 복장을 입은 사트르 부인을 가둬 놓았다.원과 캔버스의 사각형은 조응을 이루고 있다. 왼편에는 페루에서 발굴된 모체(Moche) 문명의 사람모양토기를 그려 넣었고 ‘라 벨르 앙젤(LA BELLE ANGELE: 아름다운 앙젤)’ 라고 중세 이콘화처럼 이름을 써 놓았다. ‘모치카’라고도 불리는 모체문명은 100년부터 750년까지 페루 북부 해안을 따라 번영했던 고대 문화다.
고갱이 아를에서 고흐와 헤어진 뒤 다시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항구도시 퐁타벤(Pont-Aven)으로 와서, 1889년 여름에 그린 것이다. 모델은 퐁타벤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사트르 부인이었다.
마흔 살이 된 늦깎이 화가 고갱은 사트르 부부의 신세를 갚기 위해 이 그림을 선물했으나 ‘너무 못생기게 그렸다’는 부부의 말과 함께 되돌려 받았다. 초상화의 사실적인 재현보다는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는 고갱의 독창성이 이해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1891년 드루오 경매장에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어 화가 에드가 드가가 매입하였다. 자신의 그림과 물품을 경매로 넘긴 고갱은 그 돈으로 1891년 타이티로 향하는 배를 탈 수 있었다. 고갱은 드가를 존경하였고, 드가 역시 그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며 고갱의 작품을 열 점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브르타뉴 지방의 여인들이 추수 후 짚더미를 쌓고 있다. 황금빛의 짚단을 쌓고 있는 여인들은 수확의 기쁨으로 풍요롭지만 마치 수채화처럼 캔버스가 드러날 듯거칠고 얇게 칠해져 미완성 작품처럼 보인다.
35살이란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고갱은 ‘최후의 인상파 화가’라 불리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크게 프랑스 시기와 폴리네시아 시기로 분류하지만, 작품에 브르타뉴, 타이티 풍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로서 고갱의 작품 세계를 나타나는 많은 특징들은 라틴아메리카와 관련 있다. 즉, 모계 혈통에 뿌리를 둔 고갱의 '페루적인 것'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과 페루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은 진보적인 공화주의 정치부 기자였으나 보수 성향의 나폴레옹 3세가 정권을 잡자 친척이 있는 남미 페루에 가서 신문사를 차릴 생각으로 가족과 함께 배를 탔다.
그러나 클로비스는 배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이었던 누나 마리만 페루의 항구 리마에 도착했다. 다행히 유력 가문 출신의 외종조부는 당시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 유명 정치인이었다. 그는 고갱 가족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했고, 그래서 고갱은 유년기 5년의 페루 생활이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였다고 회상하곤 했다.
사회주의 계열 노동운동가이자 페미니즘 이론가였으며 '여자 체 게바라'로 통했던 프랑스 작가 플로라 트리스탄(Flora Tristain, 1803-1844)이 고갱의 외할머니다.
그러나 1854년 후견인 외종조부가 실각하자 고갱 가족은 더 이상 페루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되어 파리로 돌아왔고, 그의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성장한 후 3년간 도선사 생활을 한 고갱은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2년 동안 복무하고, 1871년 어머니의 연인이 마련해 준 회사에 취직했다.
23세의 고갱은 성공한 파리지앵 증권 중개인으로서 11년을 근무했다. 1879년 고갱의 수입은 보너스를 받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그래서 그는 덴마크 부르조아 출신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메트 소피 가트와 결혼했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에게서 취미로 그림을 배우며, 당시 저가인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 투자해 꽤 큰 이익을 남겼다. 평소 존경하는 에드가 드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전시회에 참여하라는 권고도 받았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절은 1882년 주식 시장의 붕괴와 함께 끝났다.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고갱은 화가가 되면 유명해지고 돈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1884년, 십 년간의 결혼생활로 얻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덴마크로 돌아간 고갱은 그곳에서 사업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했으나 덴마크어를 못하는 바람에 이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부인이 덴마크 외교관을 위한 프랑스어 교습을 하며 번 돈으로 생계를 꾸렸다. 두 번의 실패로 위축되었지만 고갱은 마침내 전업화가가 되었다. 1884년 생활고에 시달리던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였고 십 년 후 갈라서게 되었다.
이 작품은 덴마크에 체류하던 시절 코펜하겐 근처 공원 풍경을 그린 초기작이다. 인상주의 화풍으로 야외에서 빛을 받아 반사되는 물빛을 다채롭게 묘사했다. 작품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습작기의 작품으로 가치가 있다. 고갱은 1886년 파리로 갔다. 그러나 곧 생활비가 많이 드는 파리를 떠나 브르타뉴 지방의 퐁타벤으로 이주했다.
이 작품은 고갱이 경제적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그려진 정물화이다. 그는 수 년간 배를 타며 외로움과 그리움을 악기 연주로 달래곤 했다. 만돌린을 연주할 줄 알아 타히티로 갈 때 두 대의 만돌린을 가져갔다. 페루의 모체문명의 사람모양 토기엔 무성한 초록 잎의 크고 화려한 작약이 심겨 있다.
일본풍의 도자기 접시는 파란색의 벽지와 화병 그리고 꽃으로 색의 하모니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강렬한 주황색의 꽃들은 배경의 차분한 파란색으로 인해 균형감을 회복한다. 왼편 풍경화의 넓고 흰 액자는 현실과 그림을 완벽히 분리해주는 효과를 위해 인상파 화가들이 많이 썼다.
파란색과 노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의 보색대비와 일본 목판화의 영향으로 평면적이며 장식성이 돋보인다. 이후 폴리네시아 시기의 고갱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꽃의 표현 등 독창성이 배태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초기작 중 최고작으로 인정받아 제 8회 인상파전에 출품되었다.
고갱은 세기말 서구사회에 불어 닥친 산업문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에서, 원시적 생활을 통해 삶과 존재의 근원을 찾으려 했다. 야성적이고 열대인 것에 대한 탐닉, 원주민에 대한 강한 이끌림, 도자 조각(Ceramic sculpture)에 대한 애착, 밝고 강렬한 원색 선호 등이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페루와 연관되어 있다.
고갱은 자의식이 강하고 독선적이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은 성격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그런 성격을 파악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내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어린 시절 스페인어를 사용하던 고갱에게 프랑스로의 갑작스러운 귀환은 새로운 언어, 문화 그리고 가난에 적응해야 했고, 그를 자의식이 강하고 냉소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다.
어쨌든 고갱은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불어보다는 스페인어에 친숙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스펀지처럼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시기였으므로 자신의 정체성의 구성하는 '인디오의 피, 야성적인 것, 잉카의 혈통, 페루적인 것’ 등에 훨씬 더 본능적으로 끌리고 집착했다.
역경은 예술가를 더욱 창의적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고갱의 인생 행로에 등장하는 모체문명 토기처럼 원시적인 것에 대한 희구가 그의 작품 세계를 지배하는 한 축이 되었다. 다른 한 축은 어두운 윤곽선으로 형태를 단순화하고, 색은 상징적으로 사용하며, 색면을 평편하게 칠하는 종합주의이다. 이리하여 인상주의에 반동하는 반 고흐, 세잔, 조르주 쇠라와 함께 후기인상주의 화가로서 상징주의, 추상주의 그리고 큐비즘을 선도하는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4회로 이어집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