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높아지는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배보상 책임론

‘가습기살균제’…높아지는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배보상 책임론

SK케미칼·애경산업 ‘금고 4년’ 판결에 불복해 상고
피해자들 “2심 유죄 선고, 사실상 면죄부나 다름 없어”
배보상 문제 ‘첩첩산중’…“기업들 유보 상태로 일관”

기사승인 2024-01-17 06:00:17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가족, 환경시민단체 등이 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2심 판결 후 가해기업들이 대법원에 상고를 했다며 잘못을 뉘우치고 피해자 배·보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가 인정돼 가해 기업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가운데 피해자들의 배보상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가해 기업들은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하고 나서면서, 배보상 문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16일 가해 기업들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환경보건시민센터 등 시민단체는 이날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가해기업들은 잘못이 없다며 곧바로 대법원에 상고했다”면서 “한 점 부끄럼도 없고 소비자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의식도 없는 살인기업과 하수인들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SK는 가습기살균제를 개발하면서 제품 안전에 대해 확인하지 않았다”며 “SK는 대부분의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살균원료를 공급한 참사의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의 이름으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SK디스커버리 부회장)을 고소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는 지난 11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을 선고했다. 그외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임직원들에게는 금고 2년 6개월~금고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다만 방어권 보장 등을 이유로 이들을 법정 구속하지는 않았다. 

이후 기업들은 유죄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법원에 상고했고, 애경산업 안 전 대표와 SK케미칼 전 사업본부장 한 모씨는 서울고법에 상고장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재판부는 이들 기업이 제조·판매한 CMIT·MIT 성분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과 이로 인한 상해 및 폐 질환·천식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를 대부분 인정했다. 이번 판결은 인과관계를 엄중히 따지던 종전 대법원 판례와 결이 다르다는 부분에서 의미가 크다. 재판부는 “CMIT·MIT 성분과 폐 질환, 천식과의 일반적 인과관계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연구들이 존재한다”면서 2011~2022년 사이 진행된 여러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23일 서울역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 유죄촉구 탄원서 캠페인을 열었다. 사진=박효상 기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2심 유죄 선고와 관련해 “사실상의 면죄부나 다름 없다”며 비판했다. 박혜정 가습기살균제피해자연합 대표는 쿠키뉴스에 “금고 5년이 최대 구형인데 금고 4년으로 판결을 내린 걸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잘못을 묵인하고 동조한 게 정부인데, 단 한 명도 정부 책임은 묻지 않고 있다”며 “정부의 신속한 책임인정은 물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보상도 제대로 진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대표는 SK케미칼 등 기업들에 대한 사법 처벌이 명확히 이뤄져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가해기업의 배보상 규모를 줄여주기 위한 물타기 작업들을 그간 해온 것”이라며 “정부가 초기에 (가습기살균제) 특허를 내주는 과정만 봐도 정부 책임이 막중하다. 기업과의 일대일 소송으론 한계가 있다. 피해자들이 단체로 뭉쳐서 정부로부터 피해 배상 합의를 받아야 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앞서 재판부는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이 생물공학 연구실을 통해 위험성을 인지하고 서울대 수의과대학에 실험을 의뢰했음에도 결과가 나오기 전에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한 점을 지적했다.

1995년 7월경 서울대 실험 결과 ‘백혈구 수치 감소 등의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나 더 실험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왔음에도 유공이 가습기 살균제의 판매중지나 회수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재판부는 봤다. 이후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 등에서 가습기살균제 판매가 이뤄졌고, 대규모 인명피해가 일어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울역 앞에서 열린 전국동시다발 가습기살균제 참사 12주기 캠페인 및 기자회견에 피해자들의 유품이 놓여져 있다. 사진=박효상 기자
법원의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실정이다. 차일피일 책임을 미루고 있어 피해자들이 실질적인 보상을 받기까진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송기진 가습기살균제 기업책임배보상추진회 대표는 배보상 문제가 앞으로 시일이 더 소요될 것이라고 염려했다. 송 대표는 “2심이 나오고 난 뒤 기업들의 항고가 계속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시간 끌기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면서 “기업들이 유보 상태로 행동하고 있는데 피해자 입장에서 너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가해 기업들이 피해자들의 배보상 문제를 조속히 실행하고 하루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면서 “유죄 판결이 난 만큼 가해 기업이 현 분담금 비율을 사회적 도의로 올려야지 해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변 환경보건위원회 위원장 최재홍 변호사도 “기업들이 1심서 무죄 판결을 받았기에 피해 배보상 관련해 별도로 피해자 합의를 해오진 않았다. 형사 건에서도 합의 절차가 진행은 안될 것”이라며 “다만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난다고 하면 그에 따른 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개별 소송이 진행 중에 있는 민사 건 내에서도 정부의 추가 연구 조사들을 기다리는 입장이라 재판이 중단된 상태”라며 “기업들도 폐 질환·천식과의 인과관계를 다투고 있는 상황이라 배보상 문제는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민사에서 재판이 아닌 조정으로 풀어질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반면 기업들은 이번 재판 결과에 대해 원론적인 입장만 내놓고 있다.

SK케미칼 측은 입장문을 통해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재판 과정에서 일부 쟁점들에 대해 충분히 소명하지 못한 점은 아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법적 절차와는 별개로 피해자들의 고충을 덜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선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명했다.

한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가해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지원 대상 피해자는 5691명, 이 중 사망자는 1262명이다.  

김한나 기자 hanna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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