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전공의들에게 내린 행정처분과 업무복귀 명령을 철회하고 병원에 낸 사직서 수리도 가능하게 했지만 전공의들은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윤석열 대통령과 주무부처 장·차관 등을 상대로 100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5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의료계를 대리하는 이병철 법무법인 찬종 변호사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전공의, 의대생 등이 최소 1000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 등 정부의 의료개혁 방안은 ‘의료 농단’이고, 정부 정책으로 의료인들이 피해를 입었단 주장이다. 소송금액은 전공의 1인당 3~4개월치 급여 1000만원을 기준으로 산정했다.
정부는 전날 전공의와 수련병원에 각각 내린 진료유지·업무개시 명령, 사직서 수리금지 명령을 풀고 복귀한 전공의에겐 행정처분 절차를 중단하기로 했다. 의료공백 사태를 매듭짓기 위해 기계적 법 집행을 거론하며 엄정 대응을 경고하던 그간의 입장을 튼 것이다. 전공의들이 병원으로 복귀할 경우 받을 불이익은 없다고 유화책도 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의료개혁 관련 현안 브리핑’을 열고 “전공의가 병원으로 복귀하는 데 걸림돌이 없도록 하겠다”며 “전공의가 복귀하면 행정처분 절차를 중단해 법적 부담 없이 수련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전공의 이탈에 따른 의료공백이 4개월째 이어지며 의료현장 곳곳에서 경고음이 나오자 사실상 백기를 든 셈이다. 조 장관은 “진료 공백이 100일이 넘으면서 현장의 의료진은 지쳐가고 있고, 중증질환자의 고통이 커지는 상황에서 전공의 복귀를 위한 정책 변경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환자들의 불편과 피해는 쌓여간다.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가 이날 발표한 ‘의료 공백으로 발생한 암환자 피해사례 2차 설문조사’에 따르면, 췌장암 환자 281명 중 67%가 진료거부를 겪었고, 51%는 항암치료 등이 미뤄졌다. 지난달 7일 암 환자 18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1차 조사에서 진료거부를 경험했다는 비율이 56%, 치료지연 비율은 43%였는데 한 달 사이 각각 11%p, 8%p 늘었다. 피해 사례로는 응급 수혈을 거부당하거나, 휴진으로 항암치료가 연기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항암 치료 중 간에 전이가 된 신규 환자를 받지 않는 병원도 있었다.
김성주 암환자권익협의회 회장은 “조사 결과 췌장암 환자 10명 중 7명가량이 의료공백으로 인해 정상적인 진료를 받지 못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중증질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도록 정부와 의료계는 환자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원의 전공의 사직 수리 절차는 본격화될 조짐이다. 대구의료원은 전공의 3명(레지던트 3명, 인턴 1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의료원 측은 정부의 행정처분 중단 결정에 따라 의료원의 신속한 정상 진료와 시민 불편 최소화를 위해 즉각 사직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전공의들의 복귀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연일 이어진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은 5일 성명을 내고 “전공의들은 누군가의 뜻에 따를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며 “환자 곁으로 돌아가는 것은 정부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서 본연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정부가 각종 명령을 철회했으니 이제 선택은 전공의들에게 달려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 결정에 따라 공은 전공의들에게 넘어갔다. 전공의들은 내년 레지던트 진급 또는 전문의 자격 취득을 위해 복귀할 것인지, 사직을 하고 다른 병원에서 일하거나 개원하는 방안 등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일부 전공의가 병원으로 복귀했으나 전체 전공의 중 10%에도 못 미친다. 이날 복지부에 따르면, 전날 기준 211개 전체 수련병원에서 근무 중인 전공의는 1만509명 중 1021명(9.7%)이다.
정부는 사직서 수리 허용을 계기로 상당수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정작 전공의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사직서 수리 발표가 나온 직후 SNS에 “정부가 뭐라고 지껄이든 궁금하지 않다. 전공의들을 하루라도 더 착취할 생각밖에 없을 텐데”라고 했다. 이어 “달라진 건 없다. 응급실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라고 썼다. 박 위원장은 사직서 제출 전까지 세브란스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근무했다.
전공의들의 복귀를 바라는 건 비단 정부와 환자만이 아니다. 선배 의사들도 돌아오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하은진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지난달 28일 열린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 기자간담회에서 “외롭다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꼭 돌아와 달라”고 전했다. 강희경 비대위원장(서울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도 “젊은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기성세대 의사로서 후배들에게 정말 죄송하다”고 울먹였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