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석 달 넘게 의료현장을 이탈한 전공의에 대한 각종 행정명령을 철회하며 퇴로를 열어줬다. 전공의들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준 이번 조치로 인해 ‘의사 불패 신화’가 재현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2026학년도 의과대학 정원 증원 절차가 시작되면 의사들은 다시 집단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이때 정부의 ‘엄정 대응’ 메시지가 힘을 잃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조규홍 장관은 전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의료개혁 관련 현안 브리핑’을 열고 “전공의들이 개별 의향에 따라 복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병원장에게 내린 사직서 수리금지명령과 전공의에게 부과한 진료유지명령, 업무개시명령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일단 복귀만 하면 그간 집단행동에 참여한 데 대해 책임을 묻거나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면허정지 등 행정처분 절차를 중단하고, 전문의 과정도 제때 밟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엄정 대응’을 경고하던 정부가 스스로 원칙을 꺾은 모습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지난 2월16일 브리핑에서 “사후 구제, 선처 등이 없다”며 “굉장히 기계적으로 법을 집행하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결국 의료공백 해소를 위해 부득이한 결단이라는 입장을 냈다. 조 장관은 “사직서 수리를 허용해 달라는 현장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며 “비판을 각오하고 사직서 수리 금지명령 등을 철회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의료현장을 이탈한 전공의들에게 가해지는 제재가 없어지면서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중도 복귀하거나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전공의들만 업무 과부하에 시달리는 등 피해를 본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조 장관은 “당연히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면서도 “정부가 의료계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진료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내린 불가피한 조치임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증원’ 빼고 모두 양보한 정부…집단행동 불이익 없다는 선례 남겨
앞선 의정갈등은 늘 ‘의사 불패’로 막을 내렸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 추진 때 의료계가 전공의부터 동네의원까지 대규모 파업에 돌입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하자, 결국 정부는 의대 정원 10% 감축과 수가 인상 등의 요구를 들어주며 백기를 들었다. 2020년 의대 증원을 추진할 당시에도 의료계는 ‘총파업’ 카드를 꺼내들었고, 정부는 증원을 철회했다.
의료계는 두 차례 정부의 양보를 받아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 의정갈등 국면에서도 자신만만했다. 노환규 대한의사협회 전 회장이 자신의 SNS에 “정부는 의사들을 이길 수 없다”며 “의사들이 겁을 먹고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의료 대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적을 정도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이번엔 ‘의사 불패 신화’를 깨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지난 3월17일 YTN 뉴스와이드에 출연해 “잘못된 의료계의 집단행동 문화의 고리를 반드시 끊어내야 한다”며 “학생과 전공의들이 먼저 집단행동을 하는 등 똑같은 패턴으로 진행되고 있다. 의료진이 부족한 상태다 보니 정부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다르게 대응하고자 한다”고 다짐했다.
‘의대 증원’ 정책을 관철시킨 점은 과거와 다르다. 단 증원을 제외하고, 전공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했다. 의료현장 이탈에 따른 처벌을 철회하며 집단행동을 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의사 파업 불패 신화’만 견고해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다.
‘의사 불패’ 악순환 끊으려면 제도적 장치·의료체계 개선 필요
문제는 내년에도 의정 갈등으로 인한 의료공백 사태가 다시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2026학년도 의대 증원 논의가 시작되면 의료계가 집단행동에 나설 여지가 열려 있다. 심지어 정부가 이미 원칙을 깬 만큼, ‘기계적 법 집행’이라는 메시지가 힘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의정 갈등이 재현될 경우 의사들의 치외법권적 행태를 규제할 방도가 없는 탓에 환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본인이 식도암 환자이기도 한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5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의료계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됐다”며 “환자를 볼모로 정부와 의료계가 실랑이만 벌였고, 결국 피해는 환자들이 입게 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내년에도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하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며 “이번에 업무개시명령이 실효적 조치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환자들의 치료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공의 이탈로 인해 의료체계가 휘청이지 않도록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회정책국장은 “이번 조치는 의사들에게만 준 특혜가 맞다”면서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공의 집단행동으로 인해 의료체계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인식이 생겼다.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탈바꿈하고, 공공의료를 확충하는 등 개선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앞으론 이런 상황이 발생해도 혼란에 빠지지 않는 시스템이 정착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