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이 넘는 의료공백 속에서 중소병원 간호사들의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다. 병원의 고질적인 인력 부족난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간호사들은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할 여력이 바닥난 상태다. 이에 전문가들은 간호사의 처우 개선을 위한 법적 테두리가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간호사 1명당 18명 이상을 봐야 해요. 근무하는 인력 중 절반 이상이 신규 간호사라 중간 연차 간호사는 쉴 날도 없어요.” 1일 서울 지역 A 중소병원에서 8년째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정유진(가명·32세)씨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울분을 토해냈다. 벌써 3개월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는 의료대란에 동료들도 모두 그만둘 판이라고 호소했다.
A병원은 간호사 인력이 늘 부족했다. 한 일반병동에 총 14명의 간호사가 근무하고 있지만 그중 7명이 지난해와 올해 입사한 신규 간호사다. 또 다른 2명의 간호사도 2~3년차에 그친다. 병원 특성 상 5~6연차 이상의 중간급 간호사가 매 근무마다 한 명 이상은 배치돼야 하는데, 남은 5명의 간호사가 거의 매일 출근하며 근무를 이어가야 하는 실정이다.
의료대란 이후 환자가 급속도로 늘어나 간호사들의 노동 부담은 배로 커졌다. 지난 2월 20일 의과대학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가 단체로 의료현장을 떠나면서 주변 대학병원에 입원하려던 신규 환자들이 정씨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기존 20~25명의 환자가 입원하던 병동은 35~39명으로 불어났다. 간호사 1명 당 18명, 많게는 20명을 돌봐야했다. 이 와중에 중간 연차 간호사들은 신규 간호사들을 가르칠 인력이 없어 자신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일을 알려줘야 하는 입장이다.
정씨는 “제대로 된 교육은커녕 의료사고가 날까 신규 간호사들에게 일을 시키기도 어렵다. 코로나19 사태 때부터 버텨온 간호사들만 뼈를 갈아 일하는 상황”이라며 “빠져나간 전공의 빈자리에 진료보조(PA) 간호사를 뽑는다고 인력 공백만 더 커졌다”고 한숨 지었다. 그러면서 “전공의가 없어 환자에게 응급상황이 생겨도 달려와 줄 의사가 부재한 것도 문제”라며 “모든 간호사가 근무하는 동안 내내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만 되 뇌인다”고 털어놨다.
수도권 지역 B중소병원 상황도 마찬가지다. 근처 대학병원의 수술이 지연되고 취소되는 일이 잦아지자 B중소병원으로 전원하는 환자들이 급증했다. B병원 역시 간호사 1명 당 16명의 환자를 봐야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하다. 더 큰 문제는 중증도가 높은 환자들이 잇따라 입원하고 있지만 이들을 돌볼 수 있는 경력직 간호사가 없다는 것이다.
9년차 간호사 임서희(가명·37세)씨는 “상태가 나빠 온갖 의료장비를 달고 오는 중증 환자들이 늘고 있는데, 제대로 간호할 수 있는 경력직 간호사가 없다”며 “몇 년 째 경력직을 상시 모집하고 있지만 소식은 없고, 2~3년 일한 간호사들도 대학병원으로 빠져나가는 현실”이라고 언급했다. 임씨는 “간호사를 구하려는 병원의 노력도 실상 적극적이지 않아 좀처럼 인력난이 해결되지 않는다”며 “법적으로 제재를 하던, 인센티브를 주던 방법을 찾지 않으면 간호사들이 대거 떠나 의료 공백을 메우던 중소병원 마저 휘청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한간호협회가 ‘2023 병원간호인력 배치현황 실태조사’를 재분석한 결과, 지난 2022년 병원을 떠난 간호사들 가운데 근무연수 1년 미만의 간호사가 43.4%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1년 이상 3년 미만 20.5%, 3년 이상 5년 미만 16.7%로 집계됐다. 근무연수가 5년 미만인 간호사가 전체 사직자의 80%를 차지하는 셈이다. 간호사들이 사직서를 낸 이유 1위는 ‘과다한 업무와 업무 부적응’(20.8%)으로 숙련된 간호사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다.
지난해 4월 보건복지부는 간호사 1인당 환자수를 5명으로 제한하는 간호인력 지원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간호인력 기준을 준수한 의료기관에 대한 보상도 강화한다는 것이다. 병원이 간호 인력을 많이 배치할수록 재정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건강보험 상 간호인력 지원 수가를 개편하는 ‘간호등급제’(간호관리료 차등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간호 단체는 정부 발표 이후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나오지 않았고 대책은 유명무실해졌다고 지적했다. 실질적인 개선을 이루기 위해선 법망부터 구축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최정화 행동하는 간호사회 사무국장은 “지난해 정부는 간호사 1인당 환자 수 제한 등 인력충원을 위한 정책을 내놓았지만 실행 방안은 구체화된 것이 없다”며 “예비간호사를 매년 증원해봤자 근무 환경을 바꾸질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공공병원에서도 간호사 1인당 환자수를 지키지 않는데 95% 이상을 차지하는 민간병원들이 돈을 써서 간호사를 채용하려고 하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적으로 1인당 환자수를 정해놓은 간호간병통합 병동도 간호사가 충원되지 않아 결국 병동이 폐쇄된 병원들도 있다”며 “지금 당장 간호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선 명확하게 환자 수 기준을 법적으로 세울 수 있는 간호인력인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간호협회 임원급 관계자는 “정부나 국회에서 간호사 처우 개선을 위해 다양한 대책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결국 뒷받침될 수 있는 법안이 없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며 “간호관리료 차등제는 처벌도, 인센티브도 미흡해 병원이 간호사를 채용하도록 유도하기엔 매력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충분한 보상 체계가 마련되려면 간호법과 같은 법적 테두리가 필요하다”며 “만성적인 인력 부족 문제를 하루 빨리 해결하려면 올해 안으로 간호법이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