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 처벌만 하면 끝?…‘36주 낙태 영상’이 드러낸 입법공백 폐해

살인죄 처벌만 하면 끝?…‘36주 낙태 영상’이 드러낸 입법공백 폐해

기사승인 2024-08-14 06:00:03
지난달 27일 ‘총 수술비용 900만원, 지옥 같던 120시간’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이 올라온 뒤, 입법 공백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유튜브 캡처

임신 36주차에 낙태(임신중단) 수술을 했다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이 조작이 아닌 사실로 밝혀지며 경찰이 살인죄 적용이 가능한지 들여다보고 있다. 다만 살인죄 성립 여부를 떠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간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36주차에 이르기까지 왜 임신중지를 하지 못 했는지’를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울경찰청은 지난 12일 정례기자간담회를 통해 영상을 게시한 20대 유튜버 A씨, 이 여성에 대한 낙태수술을 진행한 수도권 한 병원장 B씨를 살인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논란은 ‘총 수술비용 900만원, 지옥 같던 120시간’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지난달 27일 유튜브에 게재되며 시작됐다. 이 영상은 ‘36주 태아 낙태 브이로그’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영상에는 20대 여성이 “다낭성 난소 증후군으로 인해 임신 사실을 몰랐다”며 “병원 3곳을 찾아갔지만 다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무심한 내 태도가 만든 결과에 죽어버리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내용이 담겼다. 

보건복지부는 영상 속 여성과 그를 수술한 의사에게 살인 혐의로 수사를 의뢰했다. 살인죄가 성립되려면 태아가 뱃속에서 나올 때 이미 사망한 상태인지를 밝혀내야 한다. 임신 24주를 넘어가는 낙태는 모자보건법상 불법이었지만, 형법상 낙태죄가 사라지며 처벌 효력이 없다. 입법 공백 탓에 ‘태아가 살아나오면 살인, 뱃속에서 죽었으면 무죄’라는 상황까지 치달은 것이다. 다만 병원 안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고, 의료기록부상으로는 A씨가 ‘사산’한 것으로 표현돼 있어 혐의 입증은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쿠키뉴스 자료사진

살인죄 적용 여부와 별개로,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2019년 낙태죄가 폐지된 지 5년이 넘었는데도, 제도 공백 상황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의료현장에선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탓에 혼란이 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발표한 2021년 인공임신중절 의료현장 실태조사 결과 산부인과 의사 126명 중 29.7%는 법·가이드라인 부재로 인공임신중절과 관련해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했다.

의료현장의 혼란은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됐다.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지 못해 떠돌다 임신 중지가 지연되거나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용 부담을 호소하고 있다. 

임신중절약을 음성적인 경로로 구하다 부작용을 경험하는 사례도 있다. 실제 보사연이 가임기 여성(만 15~49세) 8500명을 대상으로 ‘2021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불법인 약물을 사용해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여성이 7.7%에 달했다. 특히 약물만 사용한 경우는 2.3%에 불과했지만 약물 사용 후 수술한 경우가 5.4%였다. 부작용으로 인해 수술을 추가로 감행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렇게 임신중지를 희망하는 여성들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만든 데엔 정부와 국회의 책임이 크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정부는 ‘임신 14주까지 전면 허용, 24주까지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을 때 허용’ 등 내용이 담긴 형법 및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고, 여야도 입법안을 잇따라 내놨다. 그러나 논의에 별다른 진전 없이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이번 22대 국회에선 의원 발의나 정부 발의도 전무한 실정이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저출산과 낙태는 별개의 문제인데, 같은 맥락이라고 잘못 진단해 대체입법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국민의 건강권을 지켜야 할 복지부가 입법 공백을 핑계로 임신중지 범죄화에만 몰두했다고도 지적했다. 허 입법조사관은 “태아의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했지만, 여성의 신체에도 상당한 무리가 갔을 것”이라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이번 사건이 많은 여성들에겐 ‘이렇게(임신중지) 하면 살인죄로 기소당할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 여건에 대해선 하나도 따져 묻지 않고 살인이라며 처벌 수위만 논의하는 건 정부로서의 책임을 면피한다고밖에 볼 수 없다”며 “살인죄로 수사를 의뢰한 주체가 복지부인데, 그간 복지부는 시행령을 통해 얼마든지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책임인 것처럼 몰고 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도 13일 공동 성명서를 통해 “이번 사례와 같은 후기 임신중지는 ‘낙태죄’가 존재하거나, 처벌 기준을 아무리 엄격하게 해도 일어나는 일로써, 해당 여성과 병원을 처벌한다고 해서 다시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여전히 어떻게든 여성들을 처벌하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태도가 문제다. 처벌은 더욱 비공식적이고 위험한 임신중지를 만들 뿐이며, 출산 후 영아사망률을 높이게 된다”라면서 “처벌이 아니라 되도록 빠른 시기에 임신중지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공식 의료 체계 안에서 의료적 가이드를 통해 진행돼야 하고, 상담과 관련 지원이 연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
김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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