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지역 의과대학·병원 신설을 요구하는 정치권과 지자체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병상 수를 줄이려는 정부 정책에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의료계에 따르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26일 같은 당 김형동·강명구 의원과 ‘경상북도 국립 의과대학 신설 촉구 토론회’에 참석해 “경북 국립의대 신설을 국민의힘 차원에서 강력하게 지원하고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사람이 모여 살고 오랫동안 이 땅의 중심이었던 지역에 제대로 된 상급종합병원 하나 없다는 현실을 바꿔 나가자”면서 “의대 신설을 반드시 해내겠다”고 덧붙였다. 현재 대구경북 지역 상급종합병원으로 경북대병원, 계명대동산병원, 대구가톨릭대병원, 영남대병원, 칠곡경북대병원 등이 있는데 경북 지역 의료 수요가 대구 병원으로 쏠려있어 국립의대를 신설해 병원을 더 유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기조 강연에 나선 정태주 안동대 총장은 “지역의료 문제는 기존 의대 증원만으로는 해소가 안 된다. 경북의 의료공백 문제를 뺀 의료개혁은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며 “의대가 만들어지면 졸업 후 9~10년을 지역에서 근무하도록 추진해 지역의료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전했다. 경북 안동·예천이 지역구인 김형동 의원은 ‘경상북도 국립대학교 내 의과대학 설치 및 지역의료 강화 특별법’을 발의하며 국립 안동대 의대 유치에 힘을 실었다.
야당도 거들었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민주당은 호남권에 하나, 경상권에 하나 정도 공공의대가 설립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공공의대를 추진하려면 여야 다 같이 해야 한다. 힘을 합쳐서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를 살리도록 노력하겠다”고 호응했다.
의대 신설을 바라는 지역은 경북 지역뿐만이 아니다. 현재 22대 국회에는 총 9개 지역에 의대를 신설하자는 취지의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현재 가장 가능성 높은 곳은 전남 지역이다. 순천대와 목포대는 대학 통합에 합의하고 전남권 통합의대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두 대학은 통합을 먼저 마무리하고 의대 개교를 추진할 계획이다. 전남 동부·서부 지역에서 의료인력을 함께 양성하고 대학병원을 두 지역에 모두 설립하기로 했다. 통합의대 정원은 거점국립대 의대와 비슷한 200여명 규모로 점쳐진다.
일각에선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으로 3차 병원들이 일반병상을 줄여나가고 있는 마당에 지역 의대·병원을 신설하는 것은 정책의 본래 취지를 거스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현재 구조전환 사업에 따라 전체 상급종합병원 47곳 중 약 90% 수준인 42개 기관이 경증환자를 위한 일반병상은 줄이고 중증·응급 인프라를 확충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 병원은 중환자실, 특수병상, 소아·응급·고위험분만 등 유지·강화하는 병상을 제외한 나머지 일반병상을 최대 15%가량 축소하고, 중증·응급환자 진료 비중은 70%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정부가 과잉 공급된 병상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내놓은 ‘제3기 병상수급 기본시책(2023~2027)’ 방향과도 동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021년 기준 한국의 병상 수는 인구 1000명당 12.8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4.3개)의 약 2.9배에 달한다. 이 중 일반병상 수는 인구 1000명당 7.3개로, OECD 평균(3.5개)보다 2배 이상 많다. 국민 1인당 병원 외래진료 횟수는 연간 15.7회로, OECD 회원국 평균(5.9회)의 2.6배다.
대학병원에서 추진 중인 분원들이 들어서면 병상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분원 설립 사업을 추진하는 병원들은 △세브란스병원(인천 송도) △서울대병원(경기 시흥) △인하대병원(경기 김포) △아주대병원(경기 파주) △한양대의료원(경기 안산) △서울아산병원(인천 청라) 등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미 수도권 분원이 진행되고 있는 병원이라고 하더라도 적합성 여부 등 조치사항에 해당되는 경우 엄격하게 판단해 병상 증설을 제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의료계는 지역에 의대와 병원을 신설한다고 해서 지역의료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라며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석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의대가 없는 지역에 의대를 만들면 그 지역에 의사가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환자들이 대도시의 병원을 선호하는 이상 의사들은 졸업과 동시에 대도시로 나가려고 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천문학적 돈이 드는 의대 설립 사업은 효과가 거의 없는 포퓰리즘적 정책”이라며 “단순히 의대를 늘리는 것보다는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협 비대위도 28일 브리핑문을 통해 “지역의료 살리기는 매우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병원을 지원하고 충실히 만드는 것이지 의대 신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은혜 순천향대 부천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지방의대를 만들어도 절대적으로 병원을 유지할 환자 수는 부족하고 그나마도 수도권으로 다 빠져나간다”라며 “정치권은 병원 유치로 지역주민들의 표를 얻어 재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