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민주주의가 공고해지기 위해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1)권위주의적 억압을 완화하는 초기 ‘자유화’의 단계 (2)선거 민주주의 전면화와 제도화로 상징되는 중간 민주화 단계 (3)주기적 선거를 통해 권력 교체가 반복되는 안정적 패턴이 되는 ‘공고화(consolidation)’ 단계가 그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두 번의 정권 교체(two turn-over)’가 이루어질 때 민주주의가 공고해진다고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전환의 계곡’을 통과하지 못하고 붕괴하는 경우가 많다. 2021년 군사쿠데타로 아웅산 수지가 실각한 미얀마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역전 불가능한 선거민주주의 정착이 어려운 과제이고, 그 역전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에 이를 ‘전환의 계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환의 계곡’에 갇힌 12·3 사태
주기적 선거의 공고화를 민주주의 이행의 ‘1차 전환의 계곡’이라고 한다면, 나는 다원성의 가치가 뿌리내리지 못한 채 공고화된 민주주의 틀 내에서 퇴행과 부식(腐蝕)이 발생하는 것을 ‘2차 전환의 계곡’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는 이미 민주화 과정을 통해 확립된 선거민주주의와 민주정(民主政)이라는 틀 안에서의 후퇴이며, 근본적으로는 다층적 수준의 다원성이 국가통치, 제도정치, 시민사회 내에서 뿌리 내지리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가 ‘민주적 위임 권한’이라는 이름으로 출현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예외적 수단을 일상적 정치과정에 폭력적으로 도입하는 사례 등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라면, 후자의 경우가 ‘윤석열’의 내란 시도다.
민주주의의 국가통치는 권위주의와 달리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한 상태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갈등의 전면화, 권리 옹호라는 명분 하 이익주의적 갈등의 분출, 이를 반영한 의회 내에서의 일상적 갈등 등을 동반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다원적 민주주의의 진정한 안정화란,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분투(奮鬪)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그로 인해 일상적 갈등이 나타나는 상황 속에서도 국가통치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12·3 쿠데타의 진정한 극복은 극단적인 ‘처단’ 마인드를 극복하고, 갈등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가능하다.
톡 쏘는 극단성과 편안한 다원성
극단성은 권위주의적 사회와 민주주의적 사회 모두에 존재한다. 권위주의적 극단성은 박정희 정권이 그러하였듯 수많은 학생과 언론인, 노동자의 구속, 제적, 해고,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장준하, 최종길 등의 암살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반면 민주주의적 극단성은 선거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 트럼프 정부의 이민자 추방이나 유럽 극우정당의 소수자 혐오범죄 등 비타협적 배제 정책으로 나타난다. 나는 12·3 사태를 윤석열이 민주적 극단성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권위주의적 극단성을 휘두르고자 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다음 시대는 상호 존중을 전제한 다원적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 이상적인 모습은 국가통치, 제도정치, 시민사회의 다원적 분리 위에서 실현 가능하다. 각 영역 내 개인과 집단이 반(反) 헌법적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모두의 자유로운 활동은 보장되어야 한다. 때로 부정선거론과 같은 일부 극단성이 표현의 자유나 결사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공론화 되기도 하였지만, 민주적 선거나 보편 시민들의 합리적 판단 등으로 주도권을 쥐는 것에는 실패했다. 다원적 분리가 권위주의 또는 민주주의적 극단성을 견제하여 균형을 유지한 결과다. 이처럼 다원성은 민주주의의 존속과 안정을 위한 핵심 축이 된다.
극단주의는 합법과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온다
S. 레비츠키와 D. 지블랫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Tyranny of the Minority》에서 “극단주의는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온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극단적 사상을 가진 소수가 상식적 다수를 지배하게 되는 트럼프 시대의 민주주의 위기를 지적하고자 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울림이 있다. 12·3 사태는 국가통치의 영역에 있는 윤석열이 시민사회 영역의 일부 극단성을 자기화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여과되지 않은 주장이 다원성의 균형을 깨고 공동체 전부를 파국으로 내몰았다. 이번 헌정질서 파괴 시도는 단순히 윤석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보수진영 내에 여전히 남아있는 극단성이 반영된 결과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모습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보수의 성찰이다. 보수의 가치를 지키되, 정치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새로운 이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박세일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공동체 자유주의’나 박형준 부산시장의 ‘자유 공화주의’가 보수의 이념적 중심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져본다.
극단성에 대한 경계, 다원성에 대한 수용이 보수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진보도 같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진보는 정의(正義)의 관점으로 갈등에 접근한다. 다층적 갈등을 단편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 ‘선악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동안 다원성은 실종된다. 때로는 대의적 가치를 위해 침묵을 강요하는 일도 생긴다. 이러한 극단성은 이미 진보 내부에서도 증오산업주의가 정치를 대체하였다거나, ‘정치의 종교화’ 내지는 ‘좀비정치’라는 비판으로도 제기된 바 있다.
한국, 새로운 민주주의 선도국이 되길
시민사회 내에서는 거침없는 다양성이 보장되더라도 그것은 공적 제도정치를 통해 한 번, 행정이나 통치로 이어질 때 다시 한번 여과를 거쳐야 한다. 그것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선거민주주의와 행정이 안정적일 수 있는 다원적 민주주의의 프로세스다. 그런데 최근 서구를 보면 이러한 프로세스가 삐걱대는 듯 하다. 혐오나 신(新)나치주의 등 극단적 인식이 제도권 정치에 침투하고, 원내정당으로 권력을 잡는 현상도 나타났다. 다양성이 제도정치, 통치행정으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극단성을 여과하지 못하고 다원적 순환 모델이 붕괴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류인 서구사회가 위기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 나는 한국이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동성과 건전성을 보여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윤석열의 계엄 ‘급발진’ 덕분에 우리는 극단성에 대한 경각심을 확실하게 갖게 됐다.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 펼쳐지는 다원성의 무대를 배경으로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을 통해 전환의 계곡을 넘어서야 한다. 언제나 놀라움을 보여주었던 우리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백 슬라이딩 시대를 돌파하는 전진의 역사를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