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콘텐츠 수준이 높이 올라와 있기 때문에 여러 콘텐츠를 뚫고 이렇게 빛나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현상을 즐기려고 노력 중이에요.” 2009년 영화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에 합류해 할리우드 진출 1세대로 꼽히는 배우 이병헌에게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인기는 놀라운 '현상'이다.
8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출연해도 잘 못 알아보더라”며 “이미그레이션에서 가끔 본 것 같다고 물어보는 경우는 있었어도 누군지는 잘 모른다”고 운을 뗐다.
이어 “이번에는 공개하기도 전에 마라톤을 해서 빨리 들어온 사람 몇 명에게 에피소드 1을 보여주는 이벤트에 갔는데 2천 명이 넘는 팬들이 운집했다”며 “내가 지금까지 했던 할리우드 작품을 다 합쳐도 이런 팬들이 있었을까 싶었다”고 달라진 해외 위상을 전했다.
‘오징어 게임’ 시즌1에 특별출연했던 이병헌은 이번 시즌의 전면에 나섰다. 게임 참가자 오영일로 둔갑한 프론트맨으로 성기훈(이정재)과 대척점에서 극을 함께 이끈 것. 프론트맨은 시즌1 게임의 배후로 드러난 오일남(오영수)과 유사한 장치로 작용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병헌은 “책을 처음 읽고 프론트맨이 1번으로 참가하는 부분은 저도 깜짝 놀랐다”며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를 회상했다.
“시청자는 알지만 성기훈이 프론트맨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는 부분이 큰 재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일남은 마지막 부분에 큰 반전을 줬다면, 오영일은 시청자와 나만 알고 있는 은밀한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거였죠. 시청자들은 프론트맨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프론트맨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프론트맨은 성기훈을 줄곧 감시하면서도 그에게 기대하는 듯한 인상을 줬다. 그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이병헌이 해석한 프론트맨은 성기훈을 죽이는 것이 아닌, 그가 과거 자신과 같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바라는 인물이었다.
“프론트맨의 목적은 성기훈이 자신의 신념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하고 무너뜨리는 것이에요. 그리고 성기훈도 나처럼 깨닫길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끝까지 저렇게 자기 신념을 지키는 것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감정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어쩌면 ‘성기훈의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병헌과 이정재는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해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오랜 세월 연예계에서 톱 배우로서 입지를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의 뛰어난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공교롭게 ‘오징어 게임’에서 처음 연기 호흡을 맞춰봤다.
“아무래도 서로 호흡을 맞춰본 적은 없지만 30년이라는 세월을 봤잖아요. 시상식장이나 파티에서, 아니면 다른 배우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가서 늘 봐왔던 친구니까 호흡을 맞추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어요. 그 친구도 그 세월 동안 연기를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요. 눈빛만 보면 바로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 편했어요.”
이병헌은 글로벌을 겨냥한 대작이나 할리우드 작품이 아닌, 순수 K콘텐츠 ‘오징어 게임’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음에 거듭 감사했다. “한국 작품으로 한국 감독, 한국 동료와 함께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서 사랑받는다는 게 감개무량하죠. 한국 콘텐츠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요. 출연자로서 뿌듯합니다.”
올여름께 공개 예정인 시즌3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프론트맨이 사망한다거나 성기훈이 프론트맨이 된다거나, 다양한 추측이 나오면서 기대는 더욱 높아지는 분위기다. “시즌3에서는 각자의 사연도 깊어지지만 캐릭터 간 관계에서 유기적인 드라마가 생길 거예요. 캐릭터에 더 정이 든 상태에서 더 큰 상실감과 슬픔을 느끼실 것도 같아요. 이제 이야기가 종결되기 때문에 더 재밌을 수밖에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