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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식도역류질환 치료 약물인 칼륨경쟁적위산분비차단제(P-CAB)가 임상 현장에서 활용 폭을 넓히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진료과에서 허가되지 않은 적응증으로 처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전체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시장에서 P-CAB 계열의 처방 비중이 성장세를 그리고 있다. 지난해 국내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시장에서 P-CAB 계열의 점유율은 22.3%로, 지난 2018년(0.3%)에 비해 급증했다. 개발사들이 P-CAB의 판매망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진료과에 진입한 결과로 풀이된다.
하지만 성장 이면엔 허가 받지 않은 적응증으로 판매를 크게 늘렸다는 의혹이 있다. 제약사 영업 출신 관계자 A씨는 “P-CAB의 영업·마케팅 영역이 확대되면서 처방 점유율이 커지고 있다”면서 “다만 내과 외 다른 진료과에서 P-CAB의 적응증을 벗어난 오프라벨 처방이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A씨는 “P-CAB 등 신약은 장기 사용에 따른 안전성을 입증할 자료가 부족해 공식 허가된 적응증 외의 용도로 사용한 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오프라벨 처방은 규제기관으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적응증에 약을 처방하는 행위로, 환자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쿠키뉴스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정형외과, 비뇨기과, 신경과, 신경외과 등 다양한 진료과에서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제(NSAIDs) 처방 시 위를 보호할 목적으로 P-CAB 제제를 함께 처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지역 2차병원 정형외과 B교수는 “고령 환자가 NSAIDs 약물 또는 진통제를 복용한 뒤 속이 쓰리거나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경우 처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비뇨기과의원 C원장은 “P-CAB 계열은 진통제, 특히 NSAIDs 성분을 처방할 때 같이 복용하도록 한다”면서 “주로 수술 후 비급여로 처방한다. 소화기내과나 내과가 아니면 적응증인 역류성 식도염이나 위궤양으로 처방할 일은 거의 없다”고 언급했다.
NSAIDs는 진통과 해열 효과가 있는 의약품으로, 속쓰림 등 위장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 위 보호제를 함께 처방하곤 한다. ‘NSAIDs 투여로 인한 위궤양 예방’을 목적으로 의약품이 처방되려면, 이에 대한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적응증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재까지 국내에 출시된 P-CAB 제제는 HK이노엔의 ‘케이캡’(성분명 테고프라잔), 대웅제약의 ‘펙수클루’(펙수프라잔), 제일약품의 ‘자큐보’(자스타프라잔) 등 3개가 있다. 이들 모두 NSAIDs 관련 적응증은 허가받지 않았다. 의약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P-CAB 계열에서 허가가 난 적응증은 △미란성·비미란성 위식도역류질환 치료 △위궤양 치료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 pylori) 감염 치료 등이 있다.
위식도역류질환은 질병코드로 대개 ‘K210’과 ‘K219’를 사용한다. K219는 ‘식도염을 동반하지 않은 위식도역류질환’인 경우 처방에 적용할 수 있다. 이 질환의 세부 원인에는 △과도한 음주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 △NSAIDs 등 약물 장기 복용 △스트레스 △담즙 역류 등 여러 요인이 포함된다. 그러나 질병코드 안에서 적응증이 세분화 돼 있지 않기 때문에 보험 급여를 청구할 때가 아니라면 특정 적응증을 허가받지 않은 의약품이라도 처방이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P-CAB의 효과와 안전성이 높기 때문에 오프라벨 처방에 대한 부작용 우려는 적다고 말한다. B교수는 “여러 임상 결과를 살펴보면 P-CAB은 기존 프토톤펌프억제제(PPI) 계열보다 빠른 효과를 보였고, 복용 측면에서 편리하다”면서 “NSAIDs와 같이 처방할 때 부작용이 일어난 사례는 없었으며, 제약사 측에서도 관련 임상을 완료했거나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P-CAB의 적응증이 확대되면 처방 패턴이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P-CAB 계열은 이제 막 개발된 신약인 만큼 장기적 안전성은 검토가 필요하다는 평가도 있다. 지난 20일 열린 넥시움 25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김상균 서울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P-CAB은 가장 길게 사용된 사례가 약 5년에 불과해 장기간 사용에 대한 안전성과 유효성은 확인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피력했다. 이어 정훈용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소화기내과 입장에서는 장기 처방에 따른 위장관 손상 문제를 따져봐야 한다”라며 “현재로서는 아스피린이나 NSAIDs를 사용하는 환자가 장기 처방이 필요한 경우 PPI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P-CAB을 보유한 제약사들은 ‘NSAIDs로 인한 위궤양 예방’에 대한 적응증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웅제약은 해당 적응증에 대한 임상을 모두 마치고 허가를 기다리고 있으며, 연내 허가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HK이노엔과 제일약품(자회사 온코닉테라퓨틱스)은 관련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해당 적응증이 추가되면 신경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등에서 NSAIDs 복용 환자의 위장 보호 목적으로 처방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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