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의 2023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전에 요아킴 뷔켈라어의 <4원소: 불과 물>이 전시되었다. 이는 4원소 중 불에 관한 것으로, 같은 주제의 연작 벨기에 왕립미술관의 작품 보다 5년 후에 그려졌다.
아래의 런던 그림에는 닭을 잡고 털을 뽑는 여인의 방향이 바뀌고 남자 하인은 사라졌으며, 주방 구석에서 술을 마시는 남자와 하녀 둘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불, 물, 공기, 땅의4원소를 주제로 한4점의 연작 중 하나다. <불>은16세기 부엌을, <물>, <공기>, <땅>은 플랑드르의 안트베르펜 시장을 그렸다. 각 그림에는 주제가 되는 원소와 관련된 각종 산물이 있다.
<불>의 부엌에서는 여성들이 요리를 하려고 고기를 손질하고 있다.뷔켈라어는다양하고 풍족한 음식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매우 뛰어난 붓질로 간략하고 정확하게 재현하였다.
두 작품 모두 앞쪽은16세기 풍경을, 뒤쪽 배경은 성경 장면을 돋보이게 한다. <불>의 배경에는 자매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베데곤 집에 방문한 그리스도가 그려져 있다. 마르타가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마리아는 언니를 돕는 대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을 택하였다.
나는 주방에서 일하는 마르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언니로서 방문한 손님들을 대접해야 하는 책임감이 있었고,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에게 책망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마리아가 옳다는 말씀이었다. 육신의 갈증보다 영적인 갈증을 채우는 게 더 중요하다는 교훈적인 내용이지만, 역설적으로 음식 재료들이 더 크고 자세히 강조되고 있다.
성서의 내용보다는 부엌의 활기와 음식재료들의 풍요로움을 묘사하고 싶었던 화가는 이런 구도를 만들었다. 거실은 부엌과 연결되며 공간은 확장되었고, 희미하게 스푸마토로 표현된 인물로 원근법이 적용되었다.
섬유업이 발달한 안트베르펜의 화가 답게 전면 두 여인의 옷감은 광택이 아름다우며, 자연스럽고 느슨한 주름인 드레이프와 입체감이 뛰어나다. 두 여인의 빨간 치마와 블라우스는 천정에 매달린 두 고깃덩어리와 쌍을 이루고 있다.
두 여인 사이로 부엌 한 켠에는 세 하인들이 모여 있다. 남자는 술을 마시며 탁자에 몸을 기대고, 화덕에 냄비를 거는 여인은 남자를 바라본다. 잔치에 쓰일 백랍 접시와 도자기는 부엌 바닥에 흩어져 있다.
흩어진 백납 접시는 뜻밖의 기억을 소환한다. 만3살이 되기 전,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생신을 맞아 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마당에 들어서니 가마니를 깔고 식모들이 볏짚에 연탄재를 묻혀가며 놋그릇을 닦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안고 뺨을 부비셨는데, 수염 때문에 까끌거리고 따가운 촉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아킴은 붓과 팔레트를 쥐고 바니타스(Vanitas, 인생의 덧없음))를 상징하는 해골을 안고 있다. 후대 화가의 자화상에는 대체로 한 개의 붓을 쥐기 마련인데, 플랑드르에서는 세필을 여러 개 쥐기도 한다. 오른편 뒤에는 식자재가 걸려있는 부엌을 청소하는 여인이, 한편에는 안트베르펜을 상징하는 건물과 시장이 있다.
이 초상화는 ‘나는 식재료와 시장을 그리는 화가이니 그런 그림을 주문하고 싶으면 나에게 오라’는 전단지 광고처럼 보인다.
빛은 정면 오른편에서 들어와 벗겨진 머리에서 광대로, 넓은 어깨에서 왼쪽 팔을 지나 엄지손가락으로 떨어진다. 둥근 팔레트는 마치 조명의 반사판처럼 해골의 안면부를 비춘다. 가늘고 날카로운 철필로 새긴 동판화는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는 안드레아 만테냐가, 북부 르네상스인 독일에서는 뒤러가 꽃을 피웠다.
요아킴은 음식과 가정용품을 정교하게 늘어놓은 시장과 주방 장면을 전문으로 묘사하는 플랑드르 화가였다. 그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와 북유럽의 정물화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삼촌인 암스테르담 화가 페테르 아르트센(Pieter Aertsen, 1508~1575)과 함께 시장을 주로 그린 풍속화과 정물화의 창시자였다.

돼지를 도축하여 걸어 놓은 이 그림은 정육점 간판이었다. 렘브란트 이전에 페테르 아르트센(Pieter Aertsen)이 풍속화로 도축된 고기가 걸려 있는 광경을 자주 그렸다.


삼촌 아르트센의 <정육점, 1551>엔 도축된 고기와 홍합과 굴 껍데기가 뒹굴고 있다. 여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무기)과 피(전쟁)로 독일을 통일하고, 부흥시킨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앉은 자리에서 굴을175개나 먹어 치웠다고 한다. 또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는 한 번에 굴을 1,444개를 먹었다고 한다.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굴은 비싼 식재료로 정력의 상징이었다.

닭털을 뽑고 있는 여인이 가장 크게 화면 중앙에 자리한다. 뷔켈라어는 장르적 주제와 종교적 주제를 결합하는 데 최고의 화가였다. 장르(genre)란 일정 계층을 대표하는 이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것이다.
뷔켈라어는 아치를 경계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 일행들의 정적인 모습과 주방의 마르타와 하인들의 동적인 모습이 대비되도록 구도를 잡았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영적인 양식과 실제 음식을 준비하는 육적인 물질주의를 의도적으로 대조시켰다.

오른손엔 닭을 잡고, 왼손에는 쇠꼬챙이에 끼운 고깃덩어리를 든 마르타가 우리와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힌다. 그러나 뵈켈라어는 눈과 인체 표현이 어색하다. 여인상으로 기둥을 만든 고대 그리스 신전의 카리야티드(Caryatid)와 아치와 결합된 웅장한 저택이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이후 런던 작품에서는 좀 더 평범한 주택으로 바뀐다.
낮은 의자에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하인은 몹시 지쳐 보인다. 목과 어깨를 드러낸 데콜레(decolletage)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마르타는 이와 대비되며 활력이 넘친다. 이제 ‘요리만 하면 된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주방에서 일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재료 손질이 반이라고. 요리 프로그램에서 손질된 재료를 가지고 썰기만 하고 조리하는 과정만 비춰주니 요리가 무척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쉬운 요리란 없다.
나에게 요리 그림이란 주방에서 늘 분주하던 엄마를 생각나게 한다. 난 엄마가 처음부터 당연히 요리를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둘째 고모는 엄마가 시집올 때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고 말해서 조금 놀랐다.

탁자에는 반짝이는 유리잔과 주석 접시, 탱커드(tankard)가 보인다. 탱커드는 손잡이가 하나 달리고 몸체는 원기둥 형태인 커다란 잔으로 소재는 은, 백랍, 유리, 목재, 도자기, 가죽 등 다양하다. 호프집에서 마시는500cc 맥주잔이 여기서 왔다. 이 시대에는 주로 백랍(주석)으로 만든 게 등장한다.
플랑드르 화가들은 정물화나 풍속화에서 반짝이는 주석과 유리, 철을 묘사하는 데, 도제 시절 몇 년씩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고, 빛과 그림자의 대조로 어느 지역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
그림을 보면1560년대 안트베르펜에는 먹을 것이 많은 풍요로운 도시였다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경기 침체, 악천후와 흉년 그리고 내전이 이어졌다. 이 그림은 풍요로웠던 과거를 추억하는 ‘그림 속의 떡, 화중지병(畵中之餠)’이다.
이 연작의 주문자는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에 파견되어 안트베르펜에 주재하던 외교관 페르낭 시메네스(Fernao Ximenes)로, 작품들이 캔버스에 그려져 본국으로 이송하기 쉬웠을 것이다.
미술 작품이 단순히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것만이 아닌"과거가 남긴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므로, 작품에 담긴 시대상과 사회적 변화, 문명사적인 의미를 짚어 보는 것도 중요하다. 미술 작품은 ‘인류학의 보고서’이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