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배 파행 사태를 촉발한 ‘커제 사태’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는 가운데 한국기원에서 심판 개입 시기와 관련된 규정을 신설했다. 향후 바둑 대회는 기존 관례와 같이 ‘당사자 이의제기’가 있을 경우에만 심판이 개입한다.
11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한국기원 상임심판회는 바둑 경기 규정의 세부 판정 지침에 대한 기준을 마련했다. 신설된 지침에는 경기 규정 위반사항이 발생할 경우에도 ‘당사자(선수 및 감독)’의 이의제기를 통해서만 심판이 개입해 판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사자가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심판이 개입하지 않는다.
이는 지난 1월 LG배 결승전 당시 커제 9단과 중국바둑협회가 한국기원 상임심판 판정에 공식 항의하면서 LG배 결과에 불복했던 사건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당시 커제 9단은 결승 3국에서 심판의 ‘개입 시기’를 문제 삼았고, 이로 인해 사상 초유의 ‘대국 중단’ 사태에 이은 기권패 판정이 나왔다. 사태가 일파만파 번지자, 한국기원은 2국에서 먼저 문제가 된 ‘사석룰’을 사실상 폐지 수준으로 완화하면서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커제가 규칙 위반을 했음에도 의견이 둘로 나뉜 이유도 심판 개입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동일한 상황에서 어떤 대국에선 심판이 개입을 하고 다른 대국에선 아예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이로 인해 심판의 개입 시기를 특정해서 규정에 넣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상황이었다.
한국기원 상임심판회는 “경기 규정 위반 사항에 대해 증거가 있는 방송대국의 경우 상임심판이 개입해 판정해야 한다”면서도 “경기 흐름을 끊는 경우라고 논의돼 선수나 감독이 이의제기를 하는 경우만 경기를 중단하고 판정하도록 한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규정은 모든 대국에 동일하게 적용한다.
이는 기존 바둑 대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관례로 이어져 오던 내용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과거 방송 대국이 없던 시절에는 소위 ‘증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반칙을 범한 순간에 즉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해당 상황에 대해 인정하고 넘어간 것으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심판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바둑 대회 현장에서는 ‘입회인’이 대국 개시 선언 전에 항상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착점하기 전에 손을 들고 심판을 불러달라”고 당부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입회인은 만 40세 이상, 입단 20년 경과, 7단 이상 프로기사만 가능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바둑TV에서 생방송하는 대국이 늘어남에 따라 점차 풍토가 바뀌기 시작했다. 바둑리그에서는 2012년 9월16일 경기에서 사상 처음으로 ‘비디오 판독’ 사태가 등장하기도 했다. 시간패 판정을 둘러싸고 계시원이 ‘열’을 부른 것과 대국자가 착점한 것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한국기원 공식 명칭이 입회인에서 ‘심판’으로 바뀐 시기도 2013년~2014년 사이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공식 프로대회에서는 2014년부터 심판 명칭을 사용했다”고 전했다.
한편 한국기원 ‘상임심판 제도’는 지난 2023년 4월부터 시행됐다. 올해는 10명의 상임심판이 오는 12월31일까지 활동한다.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들로 구성된 상임심판은 김광식 심판장을 필두로 이홍열·이용찬·유재성·김민희·김기용·김대용·서건우·손근기·박시열 등이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쿠키뉴스가 단독 보도한 ‘[단독] 손근기 심판 ‘오심’ 인정…한국기원, 징계 논의 착수’ 기사와 관련해 ‘오심’을 인정한 손근기 심판이 사퇴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차순위자였던 김선호 심판이 새롭게 합류해 상임심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