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센트가 죽자, 매독성 치매로 고생하던 동생 테오도 큰 충격을 받고 6개월 뒤에 죽게 된다. 테오의 부인 요한나 봉게르는 영국 박물관에서 일했으며 영어 교사였다. 요한나는 형제가 매일 한 통 이상 나눈 편지를 읽고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은 테오가 남긴 아들 빈센트 빌럼을 잘 키우고 시숙의 그림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라고 결심한다.
요한나는 빈센트의 유작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려고 하나 거부당한다. 생활고로 파리를 떠나 빈센트의 그림을 들고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하숙집을 운영하며 시숙을 알리기 위해 애쓴다. 9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일은 결코 쉽지않은 일이었다.
테오의 유언대로 전작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열었지만 실패한다. 저명한 미술평론가에게 비평 한 줄을 받을 목적으로, 그의 부인에게 접근하려고 부인회에 가입하고 그림도 선물로 준다. 그러나 오히려 정신이 이상한 여자라는 취급을 받는다.
결국 요한나는 스스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강좌를 들으며 미술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요한나는 1901년 폴란드 화가 요한 호스할크(Johan Cohen Gosschalk)와 재혼을 했다. 그는 반 고흐의 작품을 분류하고, 어느 미술관에 어떤 작품을 팔아야 할지 도움을 준다. 그러나 요한나는 남편 복이 없었는지 호스할크도 병마와 싸우다 10년 뒤에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나는 형제의 편지 668통을 모아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번역해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하여 세상에 알리게 된다.
요한나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1905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서 반 고흐 회고전이 열린다. 전시된 그림 옆에는 빈센트가 편지에 쓴 해설이 붙어 있었다. 빈센트는 항상 테오와 여동생 윌레미나 동료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와 작업 과정 그리고 당시 심경을 자세히 써서 보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전에 어느 화가도 빈센트처럼 자신의 그림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빈센트의 작품을 해설하는데 어설픈 비평이나 추측은 멀리하고, 그의 편지를 인용하는 이유다. 요한나는 그림에 스토리텔링을 입혔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빈센트의 고단했던 삶 자체가 너무나 극적이었다.
빈센트는 가난한 이들을 위로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이제 우리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그가 무엇을 그리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다. 발작한 상태의 자화상은 고통 없이 바라볼 수 없고, 진솔했던 한 남자의 가감 없는 삶과 그림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런 진정성이 전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그를 우뚝 서게 만들었다.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전시가 열리고, 이제 뉴욕에서 열리게 되었다. 파킨슨병에 걸린 요한나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1914년 네덜란드 위트레히트에 있는 테오의 묘를 프랑스 오베르의 빈센트 곁으로 이장을 한다. 여러가지 복잡한 행정 절차와 노력도 요한나의 추진력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베르 교회에서 비탈길을 올라 밀밭을 지나면, 담장이 둘러싼 공동묘지에 형제는 생전 우애를 말해주는 듯 나란히 누워 있다. 빈센트는 27살까지 제대로 된 직업도 갖지 못했고, 사랑도 실패했고 화가로서도 실패했다. 그는 죽음도 실패한 ‘실패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테오와 요한나를 보내주었다.
미국에서 전시회가 열리자 요한나는 빈센트의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미국에서 영어로 서간집을 번역하여 출간하였으며, 1925년 죽을 때까지 그 번역에 매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대한 양의 번역을 다 마치지는 못했다.
요한나는 빈센트 사후 30여 년이 흐른 뒤, 1924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해바라기>를 판매했다. 190점의 작품과 55점의 드로잉을 주요 미술관과 영향력 있는 개인 소장자에게 팔아 가치를 높였다. 그러나 <해바라기>의 경우 자신이 레플리카를 간직하고 가격을 비싸게 부르지 않는 대신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곧바로 전시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리하여 내셔널 갤러리의 사본 <해바라기>는 반 고흐 미술관에 남게 되었다.

빈센트는 아를에 고갱이 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그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12점의 해바라기를 그리려고 했다. 파리에서 테오가 일하던 구필 화랑 옆에 있는 레스토랑이 아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빈센트는 그곳 창문에 있던 커다란 해바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캔버스 세 개를 동시에 작업했다. 첫번째는 초록색 화병에 꽂힌 커다란 해바라기 세 송이를 그린 것인데, 배경은 밝고 크기는15호 캔버스이다. 두번째도 역시 세 송이인데, 그 중 하나는 꽃잎이 떨어지고 씨만 남았다. 이건 파란색 바탕이며 크기는 25호 캔버스다. 세번째는 노란색 화병에 꽂힌 열 두 송이의 해바라기며, 30호 캔버스다. 빈센트는 환한 바탕으로, 가장 멋진 그림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그 그림들을 모아 놓으면 파란색과 노란색의 심포니를 이루겠지”라며 매일 아침 해가 뜨자 마자 그림을 그려야 했다. 꽃은 빨리 시들어버리는 데다, 단번에 전체를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5점만 완성되었다. 열 네 송이의 해바라기를 그린 이 정물화는 주제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걸작을 창조해 냈다. 단지 세 가지 노란색 색조로 환상처럼 빛나는 색상 조화를 이룬다.

빈센트는 거의 전적으로 단일 색상의 색조를 사용한 그림을 그렸다. 물론 가장 유명한 예는 해바라기지만, 거의 노란색으로만 여왕처럼 그린 정물화였다. 그는 이 캔버스의 액자도 그렸는데, 이 캔버스의 유일한 원본 액자였다. 그는 테오에게 이 그림을 헌정했는데, 테오는 그에게 더 많은 색을 칠하도록 격려했다.
테오는 ‘새틴과 금으로 수놓은 천 조각의 효과’라 했고, 빈센트 역시 놀라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깊이 파야 했는가를 묘사했다. 우키요에(부세화, 일본 에도시대 신흥 상인계급과 서민 계층에서 유행하던 목판화)의 영향으로 그림자는 없고 얇게 칠해졌다.
파리 코르몽 화실에서 함께 했던 베르나르는 “빈센트가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꿈꿔왔던 빛”을 완성했다고 극찬했다. 지금 우리는 빈센트를 ‘해바라기 화가’라 부르고, ‘노란색’은 그를 상징하는 색이다. 기름을 짜기 위한 커다랗고 못생긴 꽃 해바라기를 이전엔 아무도 그리지 않았다. 이제 빈센트의 <해바라기>는 현대 예술의 아이콘이 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빈센트는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를 그리기 전에 파리에서 탁자에 놓인 잘린 네 송이 해바라기를 그렸다.
고갱은 아를에 두고 간 습작 대신에, 혹은 그걸 선물로 주면서 빈센트의 해바라기 그림 중 한 점을 요구했다. 빈센트는 어이가 없었다. “쓸모없는 그림들 때문에 나는 너무 비싼 값을 치러왔다. 심지어 내 피와 이성까지 내놓아야 했으니,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고갱은 자기가 우리보다 더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그림들은 여기에 둘 것이고 특히 내 <해바라기>는 계속 보관할 것이다.” 고갱은 이미 해바라기 그림을 두 점이나 가지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라며 화가 난 빈센트다.
그러나 심성이 착한 빈센트는 고갱에겐 작약 그림이 있고, 나에겐 해바라기 그림이 있지.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볼 때, 이 그림을 고갱에게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을 선택한 고갱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는 뜻에서 똑같은 해바라기 그림을 정확히 다시 그려주겠다 약속한다.
“정신의 광기 속에서 내 생각은 많은 바다를 항해했지. 네덜란드 유령선 꿈도 꾸었다. 어릴 때 들었던 자장가를 듣기도 하는 등 기력이 약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신경의 열기 속에서 헤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빠른 시일 내에 자네 편지를 받아볼 수 있다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네. 우리는 늘 친구라는 사실 잊지 말게”라는 간절함을 담아 1889년 1월 22일 고갱에게 편지를 보냈다.
빈센트는 그동안 간질성 정신병으로 네 번의 심한 발작을 겪었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그리고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