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과대학들이 집단으로 수업에 불참한 학생들에게 유급 예정 통보를 시작하면서 의대생 10명 중 7명이 유급될 전망이다. 이로 인해 내년에 24·25·26학번이 동시에 1학년 수업을 듣는 이른바 ‘트리플링’ 상황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대 정원 확대가 대규모 유급과 학사 혼란으로 이어지며 의학 교육의 질 저하와 의료인력 수급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4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5개 학교가 한 달 이상 무단결석한 의대생 1916명에 대해 제적 예정 통보를 완료했다. 학교별로 보면 순천향대 606명, 을지대 299명, 인제대 557명, 차의과대 190명, 건양대 264명이다. 교육부와 각 대학은 더 이상 학사 유연화 조치는 없다며 4월30일까지 복귀하지 않아 제적 사유가 발생할 경우 학칙대로 처리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지난 1일 기준 의대생들의 수업 참여율은 30%를 밑돌아 유급 예정 의대생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40개 의대 전체 재학생은 1만9760명으로 이대로라면 의대생 10명 중 7명은 유급이 불가피하다. 대학마다 학칙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전체 수업 일수의 4분의 1 또는 3분의 1 이상 결석하면 유급 처분하고, 유급이 2~4회 누적되면 제적 대상이다. 한 과목에서 F학점(낙제점)을 받으면 유급이 이뤄지기도 한다. 최종 유급 여부는 대학별 성적사정소명위원회 및 학생지도위원회를 거쳐 확정될 계획이다.
의대는 1년 단위 학년제로 커리큘럼이 짜여있어 이번 학기에 유급되면 다음 학기에 수업을 듣기 어렵다. 의대 본과 4학년은 의사국가시험 실기시험 응시가 불가하다. 1학년 예과생 24·25학번은 이번에 유급되면 내년에 들어올 26학번과 함께 수업을 받게 되는 ‘트리플링’에 빠지게 된다. 트리플링이 발생하면 사실상 의대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게 의료계의 공통된 견해다. 한 수도권 의대 교수는 “세 학번의 동시 수업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의학 교육의 질이 심각하게 저하될 뿐만 아니라, 병원 실습 역시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내년도 1학기 트리플링에 대비하기 위해 교육당국과 대학의 움직임은 바빠지는 분위기다. 동아대와 전북대는 학칙 개정을 통해 26학번에게 수강 신청 우선권을 주고 나머지 인원을 배정하는 방식 등의 대책을 세우고 있다. 의대 결손 인원에 한정해 편입학 관련 규정을 완화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대학은 부지와 건물, 교수, 수익용 기본 재산 등 4대 요건을 바탕으로 등급을 나누고 1등급이면 결손 인원 전체를, 가장 낮은 6등급이면 결손 인원의 15%까지만 편입학으로 충원할 수 있다.
일부 의대생 사이에선 6월 이후 새 정부가 출범하면 학사 유연화 조치 등을 취해 미복귀자를 구제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지만, 교육 여건상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대학들의 입장이다. 의과대학 선진화를 위한 총장협의회(의총협)와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는 “학생들이 막연한 루머를 믿고 있다. 확인되지 않고 확인할 수도 없는 헛된 기대다”라며 “정부가 대학에 학사 유연화를 요청해도 교육 여건상 수용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7~8월에 복귀한다고 해도 이미 1학기 교육과정을 마친 터라 같은 학년에서 이미 복귀한 학생과 이후 복귀한 학생을 나눠 교육과정을 2개 운영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설명이다.
교육당국과 대학은 학사 유연화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의료계는 유급 결정 시기를 최대한 연기해 학생들이 교실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울시의사회는 2일 성명을 내고 “학생들을 일괄적으로 유급 처리하겠다는 정부의 압력은 의대생의 양심적 행동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행위다”라며 “잘못된 정책의 결과로 인해 의학 교육과 의료 시스템이 무너지고 애꿎은 의대생들이 유급을 당하게 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각 대학 총장·학장들을 향해선 “교육적 유연성을 발휘해 당분간 유급 처분을 결정하지 말고, 추가적인 수업 시간 확보 및 방학 등을 이용해 학사 일정을 조절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도 학사 유연화 조처를 요구했다. 김성근 의협 대변인은 2일 정례브리핑에서 “과거 사례를 보면 수업을 못 한 경우 야간 수업 등으로 수업·실습 일수를 채우고, 의사시험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유급은 최대한 막았다”고 설명했다.
김 대변인은 “의대생에게 특혜를 달라는 말이 아니다. 의사라는 직업 특성상 군의관, 공중보건의사 등 필요한 역할이 많기 때문에 적정 수가 배출돼야 한다”며 “어느 정도의 학사 유연화 조치는 앞으로 고민돼야 할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여력이 안 되면 입학 모집인원을 다시 조정해서라도 의학 교육의 질 저하를 방지해야 한다”면서 “트리플링이 되기 전에 학사 유연화 조치를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확한 의대생 유급 규모는 오는 9일 이후에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 관계자는 “오는 7일까지 각 대학으로부터 미복귀 의대생에 대한 유급 기준일, 대상자 수, 유급 확정 통보 인원 등을 담은 서식을 제출받을 예정”이라며 “유급 규모 등은 오는 9일 이후에나 공개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복귀하지 않아 유급 등 사유가 발생하는 학생들이 학기 말 유급이 취소되거나 구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