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창설돼 제30회를 맞은 유서 깊은 세계대회 LG배. 같은 시기 개최된 삼성화재배와 함께 한국이 주최하는 ‘유이’한 메이저 세계바둑대회로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일본 등 이웃 국가들의 인정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한국 바둑 최대 라이벌인 중국이 지난 제29회 LG배 결승 3국 이후 ‘불복’을 선언했고, 한국기원과 중국바둑협회가 원만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중국 선수단이 전격 ‘불참’을 통보했다.
바둑계 각계각층에서 성토가 이어졌다. 한 원로 프로기사는 쿠키뉴스와 통화에서 “반외 규정인 사석룰로 세계대회 결승전을 ‘반칙패(제29회 LG배 결승 2국)’로 끝낸 ‘원죄’가 한국기원에 있다”면서 “LG배에 중국 선수단 전원이 불참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인데, 한국기원 관계자 중 누구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고 질타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제30회 LG배 공고가 올라왔을 때 중국 7명이 출전한다고 공식적으로 명시돼 있었다”면서 “한국기원이 중국 측 선수단이 출전하는지 불참하는지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공고를 게재하고 예선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라고 꼬집었다.
한국기원은 난국을 ‘역대 우승자 초청’ 카드로 타개했다. 영화 ‘승부’ 실제 주인공 이창호 9단을 필두로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 9단 등 한국 레전드 프로기사, 예선에서 탈락한 강동윤 9단 등이 본선 출전 기회를 얻었다. 일본기원 소속 왕리청 9단과 장쉬 9단, 대만기원 소속 저우쥔쉰 9단 등 중국을 제외한 LG배 우승 경력자들이 오랜만에 세계 무대에 섰고, 그래도 부족한 인원은 최정 9단, 스미레 4단 등 여자 기사들로 채웠다.
중국이 불참한 이번 LG배를 메이저 세계대회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부터, 역대 우승자 중 유일하게 은퇴한 이세돌 전 프로기사는 왜 출전하지 않았는지 등등 수많은 궁금증과 함께 출발한 이번 제30회 LG배는 19일 24강, 21일 16강을 치르면서 8강 진출자를 가려냈다.
19일 열린 본선 24강에선 예상 외로 ‘역대 우승자’들의 선전이 돋보였다. 장쉬 9단이 한국 랭킹 9위 안성준 9단을 꺾고 16강에 올랐고, 저우쥔쉰 9단 또한 이원도 9단을 제압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주최측 시드를 받아 합류한 최정 9단 또한 심재익 7단을 꺾고 16강 무대를 밟았다. 최 9단은 예선에서 한국 랭킹 161위 곽원근 4단에게 패해 탈락했지만, 중국의 불참으로 기회를 얻었다. 이번 대회 본선 최연소 출전자인 스미레 4단 또한 ‘최고령’ 왕리청 9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16강에 오르면서 다채로운 대진이 완성됐다.
16강전 빅매치는 역시 신진서-박정환이 격돌한 ‘신박 대전’이었다. 이 대결에서 2년 10개월 동안 신진서 9단에게 17연패를 당하고 있던 박정환 9단이 상대 전적 23승46패 ‘더블 스코어’ 열세를 뒤엎고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2년 연속 우승자가 없는 LG배에서 첫 ‘2연패’ 도전에 나선 변상일 9단은 저우쥔쉰 9단을 가볍게 물리치고 8강 무대를 밟으면서 8강에선 박정환-변상일 대진이 완성되기도 했다.
8강 진출자는 한국 6명, 일본 1명, 대만 1명(박정환-변상일, 강동윤-신민준, 설현준-쉬하오훙, 안국현-이치리키 료)이다.

한편 이번 사태는 지난 1월22일 열린 제29회 LG배 결승 2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승 1국에서 기선을 제압하면서 우승까지 단 1승을 남긴 중국 커제 9단은 2국에서도 초반부터 큰 우세를 잡았다. 하지만 한국에만 존재하는 ‘사석(死石·따낸 돌)’ 관리 규정에 의해 경고 1회와 벌점 2집을 받은 데 이어, 잠시 후 다시 같은 규정 위반으로 ‘반칙패’를 당했다.
1-1 상황에서 펼친 결승 3국은 반대로 변상일 9단이 유리한 흐름이었다. 커제 9단의 패배가 결정적인 국면에서 초·중반 사석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던 커제 9단이 연속해서 따낸 돌을 아무렇게나 던지는 행위를 반복했고, 심판이 개입해 경고 1회와 벌점 2집을 부여했다.
커제 9단은 심판 판정에 불복해 크게 항의했다. 한국 손근기 심판에게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인 커제 9단은 결국 경기장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고, 한국기원은 ‘기권패’를 선언했다. 변상일 9단 입장에선 불리한 국면에서 2국 ‘반칙승’, 반대로 3국은 필승지세 국면에서 ‘기권승’을 거두면서 우승을 한 셈이 됐고, 중국 바둑 팬들은 변 9단의 우승을 조롱하는 ‘밈’을 만드는 등 감정 싸움으로 번졌다.
쿠키뉴스가 지난 2월5일 단독 보도한 ‘[단독] ‘LG배 사태’ 의견 낸 신진서 “3국은 커제 잘못도 크다” [쿠키인터뷰]’ 기사가 중국 주요 언론에 번역돼 실렸고, 이후 중국 바둑 팬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여전히 커제 9단을 옹호하는 의견도 적지 않지만, ‘세계 일인자’ 신진서 9단의 의견대로 3국을 두다 말고 항의를 하다 대국장을 이탈한 커제 9단의 행동 역시 잘못이라는 견해도 힘을 받았다.
한국 주최 ‘풀리그 대회’인 쏘팔코사놀배에 커제 9단을 비롯한 중국 선수단이 불참하는 등 경색 국면을 보였던 양국 관계는 최근 다시 교류를 이어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LG배 사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한국기원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당장 중국 바둑리그 출전 불가 조치 또한 풀어야 할 난제다. 바둑계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한국 프로기사들이 중국 바둑리그(갑조리그, 을조리그, 여자리그 등)에 용병으로 출전하면서 매년 약 15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면서 “LG배 사태 이후 올해 한국 선수들의 중국리그 진출이 좌절됐는데, 이로 인한 손실이 막대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