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 현대사 격동기의 산 증인,김수환 추기경

우리나라 근 현대사 격동기의 산 증인,김수환 추기경

기사승인 2009-02-16 23:32:01
[쿠키 문화] 엄혹했던 군사 정권 시절부터 민주화와 인권 수호의 굵은 버팀목 역할을 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종교와 정파를 넘어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16일 선종한 그의 87년 생애는 우리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나간 것이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8일(음력) 대구시 남산동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요한)은 탄압이 극심했던 시절 천주교 복음을 받아들였다가 1868년 무진박해 때 체포돼 결국 감옥에서 아사(餓死)로 순교했던 인물이다. 이 같은 집안 환경으로 김 추기경은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이 돈독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을 여읜 그는 모친의 권유에 따라 세 살 많은 형 동환과 함께 사제의 길을 걷게 됐다.

김 추기경은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치고 1933년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소신학교 과정인 서울의 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에는 일제에 대한 울분을 일기장에 적을 정도로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졸업반인 5학년 때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받고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 선생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교장은 그러나 나중에 김 추기경이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 교장은 제2공화국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였다.

김 추기경은 1941년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한때 학병에 징집돼 도쿄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기도 했으나 다행히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할 수 있었다.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으며 다음해 초 서울의 성신대학(가톨릭대 신학부)으로 편입했다. 스물아홉 살에 사제서품을 받아 경북 안동본당(지금의 목성동 주교좌 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5년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학생들과 장난을 치며 격의 없이 지내고 웃을 때 코가 벌름거린다고 해서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오른 김 추기경은 뮌스터 대학에서 7년간 체류했다. 그 때 요셉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그리스도 사회학’은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하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인간관 및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된다. 47세로 당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시골뜨기 주교’에서 한국 천주교의 중심인물이 된 그는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며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구심점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두환 정권 시기인 1987년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의 농성 학생들을 연행하려는 경찰 병력의 투입을 끝까지 막아냈다. “여기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맨앞에 당신들이 만날 사람은 나다. 내 뒤에 신부들이 있고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나를 밟고, 우리 신부들도 밟고, 수녀들을 밟고 넘어서야 학생들을 만난다”며 그는 맞섰다. 그 시절에 대해 김 추기경은 “나는 19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은퇴 이후에도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2003년 11월18일 서울대 초청 강연에서 “삶이 뭔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라고 말해 좌중이 폭소를 터뜨렸다는 일화가 그의 평소 면모를 잘 설명해준다.

노무현 정권 때는 시국에 대한 문제 제기로 종종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너와 너희 모두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세상에 대한 종교인의 사명감을 잃지 않았던 김 추기경의 삶에 대해 입장을 달리 했던 사람들도 경의를 표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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