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정치] 국회에 신뢰와 타협이 사라져가고 있다. 여야 대표들이 서명한 합의문은 잉크가 마르기 전에 부정되거나, 지켜지지 않는다. 임시국회 협상때마다 ‘대치-파행-합의문 작성-합의문 파기 논란’이 되풀이된다. 수천명의 전경들이 국회 본관 주변을 둘러싸는 풍경도 이제 관행화되는 분위기다. “정치권에 최소한의 상도의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탄식이 나온다.
◇합의문이 무슨 소용?=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들은 지난 2일 4개항의 합의안을 만들었다. 이중 2개가 지켜지지 않았다. ‘경제관련법은 여야정 협의를 거쳐 수정해 처리한다’고 합의됐으나, 출총제 폐지법안만 본회의장 소란 속에 처리됐고, 은행법 개정안 등 나머지 경제관련법안은 처리되지 못했다. 나머지 2개도 지켜질 지 미지수다.
여야는 최대쟁점인 미디어 관련 4개법안과 관련, ‘100일간 논의해 6월에 표결처리한다’고 합의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민주당 소속 문방위 의원들은 “우리는 표결처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지난해말 세계적 뉴스거리였던 ‘입법전쟁’을 치른 뒤 작성된 1월6일 합의안도 비슷하다. 여야는 2월 국회에서 줄곧 서로를 겨냥해 “합의문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입씨름만 했다. 합의문의 애매한 표현을 둘러싼 정쟁이었다. 당시 합의문 작성에 참여했던 자유선진당 권선택 원내대표는 4일 “1월 합의안도 사실상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며 “FTA 비준동의안을 빠른 시일 내에 협의처리한다는 조항은 사실상 2월에 처리하자는 의미였다”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여야 내부에서는 “도대체 왜 합의안을 쓰는 지 모르겠다”는 푸념들이 나온다. 한나라당 조해진 의원은 “합의안을 썼지만, 민주당이 6월 표결처리에 응해서 정상적으로 처리될 것으로 믿기 힘들다”고 말했다.
◇권위의 실종=한나라당 민주당 모두 책임론을 피하기 힘들다. 권 원내대표는 “한나라당은 공사일정 관리하듯이 직권상정 속도전을 벌이고, 민주당은 대안없는 투쟁만 계속하니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도체제의 취약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합의문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합의문을 작성한 지도부 권위에 대한 불신이라는 것이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모두 현 지도체제가 취약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며 “박근혜 전 대표가 합의문에 서명했다면 한나라당 의원들이 반발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합의안이 나온 다음날 민주당 내 민주연대 등 개혁그룹이 반대성명을 내는 일이 벌어졌고, 원혜영 원내대표의 입지가 상당히 흔들렸다. 한나라당 진영 의원은 “지도부를 선택했으면 힘을 모아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아쉽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여야 의원들 모두 자신들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있다”며 “국민들로부터 정치권 불신이라는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데 자신들만의 세상에 갇혀 위기감을 못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남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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