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로에 몰린 1급 공무원 “아!옛날이여”

퇴로에 몰린 1급 공무원 “아!옛날이여”

기사승인 2009-06-05 17:59:03

[쿠키 경제] #장면1. 지난해 9월 강남 A한정식집. 참여정부 시절 장관을 지낸 한 인사가 차관급 이상을 지내고 ‘실업’ 상태인 후배들에게 번개모임 제안을 돌린 날이었다. 기껏해야 4∼5명 올 줄 알았던 자리는 11명이 참석해 방이 그득해졌다. 술이 한순배씩 돌자 하소연이 이어졌다. “와이프 눈길을 피해 시내에 있는 친구 사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권력무상이더라. 현직에 있을 때 90도로 고개숙이던 사람들이 본 척 만 척 하더라.”

#장면2. 지난달 서울의 B법무법인 사무실. 이명박 정부 들어 차관보급(1급)에 오른 뒤 채 1년이 안 돼 물러난 한 인사의 최종 취업면접이 있었다. 그는 “아직 대학다니는 애도 있고 살림살이도 있는데 퇴직후 지난 넉달간 연금만 갖고 살아보니 헛웃음만 나더라”며 “공직자윤리법에 저촉되지 않는 완벽한 직업은 자영업밖에 없는데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로펌(법무법인) 취업에 나섰다”고 했다.

일반 공무원으로 승진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인 1급. ‘공직의 꽃’으로 불리는 1급 공무원들이 흔들리고 있다. “1급 임명과 동시에 단기계약직이 되는 셈”이라는 자조섞인 말처럼 단명(短命)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사무관 시절부터 익혀온 전문성을 맘껏 발휘해야 할 시점이지만 정권교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교체가 잦아지면서 정부 코드 맞추기에 급급하고 있다는 비판도 들린다. 공직 생활을 접은 뒤 제2의 인생을 시작할 기회를 창출해주는 사회적 여건은 물론 ‘낙하산’에 목매지 않는 자체적인 노력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코너에 몰린 ‘공직의 꽃’

중앙부처에서 차관보나 실장에 해당하는 1급 공무원은 누구나 될 자격은 있지만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국가고시 합격후 5급 사무관에서 출발해도 25년 이상 일하며 업무능력을 인정받아야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다. 때문에 실무에 관한 한 국회나 정무직인 장·차관앞에서도 제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수 있었던 힘있는 자리였다.

그랬던 1급들이 달라지고 있다. 정권따라 엎치락 뒤치락했던 정책 방향과 반복된 물갈이 인사를 경험하면서 주관은 꺾이고 직무에 대한 불안감은 더해졌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정권 교체시점인 1월부터 6월까지 퇴직한 고위공무원 108명의 연령을 조사한 결과 54세 이하가 전체의 절반을 조금 웃도는 50.9%로 집계됐다. 50세 이상 54세 이하는 52명이었고 40대에 퇴직한 고위공무원도 3명이나 됐다.

현재 고위공무원단 가운데 1급에 해당하는 자리는 290개. 이 가운데 현재 활동중인 1급 공무원 수는 279명이다.

정부 관계자는 5일 “현 정부 들어 공직 순환이 빨라지고 있다”며 “지난해 큰 틀의 조직개편에 이어 하위조직을 통·폐합하는 대국대과제가 시행되면서 최고위직인 1급들의 평균 재임기간도 짧아졌고, 밑에서도 직위 승진했다가 내려앉는 과장급 공무원도 많아져 공직 불안감이 커져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수에 치이고, 정권에 눈치보고

지난해 1급으로 승진한 경제부처의 A씨는 최근 “후배들에게 길을 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직·간접적으로 듣는다. A씨는 “나때문에 인사적체가 심해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50대 초반에 나가서 전문성을 살릴 일이 많지 않아 버티고 있다”며 웃었다. 기수에 따른 인사시스템으로 기수가 낮아도 명예롭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탓이다.

정권교체와 개각이 단행될 때에도 1급들은 단골 정리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올초에도 1급들은 대거 옷을 벗었다. 공직사회 내부에서는 능력 여하를 떠나 지난 정권에 중용됐던 인사들이 교체 1순위였다는 말이 돌았다. 사정이 이러니 1급 등 고위공무원에게 영혼이 있는 공무원상이 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한 1급 공무원은 “단기 계약직인 만큼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반발하는 것은 최대 금기 사항”이라며 “현 정권 임기내에 정무직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라도 코드를 맞출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해외진출 등 대안 모색해야

국내금융 업무가 떨어져 나간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은 지식경제부 등 산하기관이 많은 부처가 부럽다. 소신있게 일하다 인사 유탄을 맞더라도 멜 수 있었던 낙하산(산하기관장 자리)이 고작 서너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정부 한 간부는 “모피아(재무부 관료 출신을 마피아에 빗대어 부르는말)란 말도 이제는 옛말”이라며 “조직이 끝까지 뒤를 챙겨주는 시대는 지난것 같다”고 말했다.

국가공무원법상 1급은 준정무직에 해당한다. 신분보장이 안되는 자리라는 뜻이다. 그러니 장관이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인사 이동이 반복되면서 전문분야에 대한 소신은 옅어지고 ‘코드 맞추기’에만 급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상임이사로 나간 이희수 전 재정부 세제실장 등 해외로 문호를 넓히고 있지만 이 역시 우리나라에 할당된 인사를 채우는 것이지 외국 인재들과 경쟁해 가는 공모직은 아직까지 ‘그림의 떡’인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퇴직을 앞둔 고위공무원들을 위한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공공정책실 도건우 박사는 “우선적으로 서열에 따른 인사와 인위적인 퇴직을 막아야 하겠지만 단기간에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며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외국기관 공모직 지원 요령 등 퇴직후 실무적인 잡 트레이닝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성규 정동권 김원철 기자
danchung@kmib.co.kr
정동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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