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연극 ‘썸걸(즈)’는 서로를 대하는 남녀의 엇갈린 마음을 이야기한다.
성공한 영화감독 ‘강진우’는 결혼을 앞두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들과 재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약혼녀 몰래 불륜을 꿈꾸기 위해서 발걸음을 한 것이 아니라 그는 과거 여자들에게 “내가 뭐 잘못했나?” “나한테 화난 거 아니지?”라는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한 행보였다. 그가 왜 그 답을 얻으려는 지가 이 연극의 관람 포인트다.
그는 전화를 걸어 무대 위로 네 명의 여자친구, ‘첫사랑’ ‘쉬운 여자’ ‘선배의 부인’ ‘진짜 사랑했던 여자’를 차례로 불러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첫사랑은 평범한 주부가 됐고, 당시의 추억을 되새기다가 “자기를 잡아주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가장 예쁜 여자로 기억되고 싶다”며 그 ‘누군가’를 남편이 아닌 강진우로 지목하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겉모습은 세월이 묻은 아줌마이지만 가슴 속에는 여전히 양 갈래 머리를 딴 소녀가 아련한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불량스럽게 보이고 등장부터 술에 취해있는 쉬운 여자는 ‘강진우’에게 “너와의 관계를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어” “생각은 있니?” “나 너랑 잘 때 다른 여자 생각 했어”라는 치욕적이고 잔인한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어떠한 복수를 꿈꾸거나 악의적 행동을 보이지 않고, 다만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사랑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선배의 부인은 같은 영화감독이지만 자기 남편에게는 발견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강진우’에게 있다고 이야기한다. ‘강진우’라는 사람과 그의 이야기, 그가 만든 영화 등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에 복수를 계획한다. 하지만 독한 마음을 먹었던 것도 잠시, 강진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선글라스를 끼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를 사랑했던 쓸쓸함이 느껴진다.
‘강진우’가 만난 마지막 여인은 그가 진짜 사랑했던 여자였고, 지금 약혼녀와 가장 닮았다며 사진을 보여준다. 그녀 역시 그를 다 잊은 척 쿨하게 행동하지만 결국 힘들게 잊었는데 왜 다시 연락했냐며 눈물을 보이고 만다.
연극 ‘썸걸(즈)’는 사랑 앞에서 남녀가 동등한 입장이 아님을 말해준다. 연인관계가 지속될지 아닐 지에 대한 칼자루는 남자가 쥐고 있고, 결국 작품에서는 ‘강진우’가 ‘갑’의 입장이 되고 네 명의 여자들은 ‘을’이 된다.
‘갑’인 ‘강진우’는 항상 자유로웠다. 궁지에 몰리거나 책임을 져야할 상황이거나 현실을 회피하고 싶으면 행동에 제약을 받는 법이 없었다.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졌고,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쳤다.
크리스마스 날 ‘첫사랑’을 혼자 두고 다른 여학생들과 놀러갔고, 마음으로는 다른 여자를 그리며 ‘쉬운 여자’와 육체적 쾌락만을 나누었고, 그녀를 성적 도구로만 치부했다. ‘선배의 부인’과 스캔들이 났을 때는 혼자 도망쳤으며 ‘진짜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불쑥 떠나버렸다.
여자들을 ‘을’로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자신을 버렸던 ‘강진우’를 가슴에 묻고 있었고, 전화를 하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 나왔다는 것이다. 가정이 있어도, 모욕적 언행을 느꼈어도, 배우생활을 못하고 있어도, 그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게 됐어도 이 여자들은 그를 잊지 못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만한 것은 만약 애인 있는 여자들에게 남자친구가 ‘강진우’ 역을 맡는다고 한다면 본인은 어떤 역할을 하겠냐고 묻는 것이다. 대부분 약혼녀나 진짜 사랑했던 여자를 뽑을 것이고 쉬운 여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썸걸(즈)’를 본 이상 “내가 혹시?”라는 두려움(?)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서 앉아 있다가 남자 배우의 등장으로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시간이 조금 지나 ‘첫사랑’ 역할의 여자 배우가 나오면 웃음이 나기 시작하고 그녀의 고리타분함에 실소도 터진다. ‘쉬운 여자’로 무대는 에너지가 넘치는 반면 씁쓸함도 더해진다. ‘선배의 부인’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긴장감이 생기고 박장대소하게 만든다. ‘진짜 사랑하는 여자’로
대반전을 경험할 수 있다.
연극 ‘썸걸(즈)’는 서울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에서 2011년 1월 2일까지 공연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최은화 기자 choieh@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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