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인 버킨, ‘프렌치 시크’를 창조하다
지난 1984년, 최고의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최고경영자 장 루이 뒤마는 영국 런던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서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다. 옆 자리에 앉은 여배우 제인 버킨의 가방 속 물건들이 자신의 무릎 위로 쏟아진 것. 주머니가 없는 가방 때문에 번거로워하는 그녀를 위해 장 루이 뒤마는 장차 20년 후 ‘시크함’의 대명사가 될 가방을 만든다. 바로 제인 버킨의 이름을 딴 ‘버킨 백.’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그러나 자세히 보면 최고급 소재로만 이루어진 이 백은 그 이름의 본래 주인과도 닮았다. 자유분방과 당당함으로 무장한 여배우 제인 버킨은 ‘프렌치 시크’ 단어 그 자체였다. ‘시크’라는 단어는 그 전에도 존재했지만, 그 때부터 ‘거침없으면서도 꾸미지 않은 듯,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버킨의 성격 그대로가 ‘시크’의 의미로 재정립된다.
★ 21세기, 실용주의의 도래
화려하고 눈에 띄며 복잡한 것을 선호했던 20세기와 달리, 21세기에 들어서며 패션을 위시한 상업디자인에는 두 가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자연주의’와 ‘실용주의’.
지난 2001년 발생한 9·11 테러 이후 패션계는 무채색과 절제된 옷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다. 이를 계기로 화려하거나 다소 거칠었던 20세기의 유행과는 다른,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자연에 가까운 옷과 인테리어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시금 주목받은 것이 20여 년 동안 조용히, 유행과는 상관없이 존재감을 지니고 있던 ‘프렌치 시크’이다.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제인 버킨’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여성들의 아름다움이 ‘시크’라는 단어로 대변된 것이다.
이 시기에 ‘시크’는 온갖 트렌드 북과 색채용어를 넘나들며 ‘세련된’ ‘고급스러운’ ‘저채도의’ ‘차분한’ ‘고상한’의 단어를 대신했다. 기존에 있던 단어는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패션계 사람들에게 새롭고 신선한 단어 ‘시크’가 사랑받기 시작한 것. 때마침 불어 온 귀족주의와 웰빙 바람을 타고 ‘시크’는 무서운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 ‘무심한 듯 시크하게’… 이제는 행동양식이 된 ‘시크’
지난 2009년 방송된 SBS 주말드라마 ‘스타일’에서 패션잡지 편집장 역할을 맡은 김혜수가 입버릇처럼 내뱉은 단어들이 있다. ‘에지’와 ‘시크’가 바로 그 것. 일반 대중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드라마에서 일상적으로 등장한 단어 ‘시크’는 금세 생활에 스며들었다. ‘무심한 듯 시크한’ 패션의 스타들이 뉴스에 오르락내리락했고, ‘시크하게 웃기는’ 개그맨들이 예능에서 선전했다. ‘무표정’ 대신 ‘시크한 표정’의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는가 하면, ‘다소 불손하다 싶을 정도로 툭툭 내뱉어 말하는’ 친구는 ‘시크한 성격’이 됐다.
런웨이와 컬렉션을 거쳐 대중에게 스며든 ‘시크’는 이제 행동·생활양식마저 표현하는 단어가 됐다. ‘시크’는 차분함과 고상함을 대변하는가 하면 꾸미지 않은 자유분방한 아름다움, 다소 반대로 느껴지는 태도와 분위기를 표현해 낸다. 게다가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니힐리즘(허무주의) 혹은 스노비즘(속물근성)까지 포괄하며 이제는 뭐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는 단어가 됐다. ‘제인 버킨’의 가방에서 출발한 ‘시크’는 하나의 ‘문화’가 됐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은지 기자 rickonbge@kuk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