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오는 22일 개봉하는 영화 ‘도가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2005년 세상에 알려져 충격을 줬던 광주의 한 청각장애 특수학교에서 벌어진 학생들을 상대로 한 교직원들의 집단 성폭력 사건. 가해자 중엔 학교 이사장의 첫째 아들인 교장과 둘째 아들인 행정실장이 포함돼 있다.
이 사건은 2009년 공지영씨의 소설 ‘도가니’로 그려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이번엔 배우 공유·정유미 주연의 영화로 그 실체를 고발하게 돼 다시 한 번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시간만 흘렀지 변한 것이 없다”
실로암사람들 대표인 김용목(49) 목사는 소설 도가니에서 ‘최요한 목사’라는 인물로 그려졌다. 그는 사건이 불거진 후 이 사건의 대책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았었다.
“변한 건 시간이 지났다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아요.”
‘6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이번에 영화로까지 제작됐는데 뭔가 변화를 느끼시냐’는 질문에 나온 그의 대답이다.
공지영이라는 걸출한 소설가의 손을 거쳐 엄청난 화제를 모았지만 이어지고 있는 현실은 이상하리만치 소설 속 무진을 뒤덮고 있는 안개만큼이나 먹먹하기만 하다.
김 목사는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최소한은 됐다고 쳐봐요”라며 “하지만 피해학생들에 대한 피해 보상이나 심리적 치료 등 사후에 당연히 학교 측에서 해야 할 조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어요”라며 한숨을 쉬었다.
김 목사는 가해자 처벌에 대해 ‘최소한은 됐다’고 애써 평가했지만 이를 납득할 이들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당시 인권위 조사 결과 가해자는 6명. 공소시효와 친고죄 규정으로 인해 교직원 4명만 형사처벌됐고 이들마저도 2008년 7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더구나 인권위 조사와 달리 대책위가 파악한 가해자들은 10여명이다.
여기에 이같은 일들이 수년간 이어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여전히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더욱 개탄스럽다.
사건 당시 이 학교는 이사장의 첫째 아들이 교장, 둘째 아들이 행정실장이었고, 이사장의 친인척들도 재단내 시설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이 학교는 소위 ‘연줄’이 닿지 않으면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이었다. 즉, 이같은 친인척 족벌 운영체제가 피해학생들의 비명소리가 수년간 세상 밖 사람들에게 들리지 못하고 안에서만 맴돌게 했던 구조적 병폐였던 셈이다.
이사진 전면 교체 등 이 학교의 대대적인 메스를 가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법적·절차적 허점을 이용해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학교측의 ‘잔꾀’는 대책위를 지치게 만들었다.
“지난 2006년, 2007년 이사진 회의록을 본 적이 있어요. 피해학생들에 대한 내용은 일언반구도 없더군요.”
김 목사는 이 학교의 현재 이사장이 사건 당시 이사장의 사위라고 밝혔다. 교장은 공석이고 셋째 아들의 친구인 교감이 교장직까지 대행하고 있다. 학교 폐쇄는 고사하고 이런 구조적 문제점이라도 바꿀 수 있는 사회복지사업법 등 관련된 법적근거는 여전히 미약하다는 것이 김 목사의 설명이다.
“그 친인척이란 사람들은 지금도 그 학교에서 일해요.”
시사회에서 관객들을 탄식하게 만들었던 ‘2011년 현재 가해자 중 일부는 학교에 복직하였다’라는 자막은 이들을 두고 한 말일까.
과연 소설이나 영화는 어디까지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픽션일까.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모티브는 소설과 영화 안에서 얼마만큼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걸까. 충격적인만큼 이 모든 것이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배우 공유가 연기하는 교사 강인호는 허구의 인물이다. 하지만 정유미가 연기하는 인권운동센터 간사 서유진은 당시 한 시민단체 소속의 실제 인물이다. 김 목사는 그녀가 현재 이민을 갔다고 했다. 다만 이 사건 때문에 간 건 아니란다.
더욱 기막힌 것은 소설 속에서 피해자로 등장하는 학생 ‘연두’ ‘유리’ ‘민수’다. 그저 피해자들을 이 세 명의 등장인물로 압축해 전부 투영시킨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김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등장인물과 정황은 차이가 있지만 모두 실체적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요즘 피해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이들은 장애인 공동생활가정 ‘홀더’(‘홀로 삶을 세우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약칭)의 보살핌을 받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성인이 돼 광주에서나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응에 실패해 관두곤 했단다.
현재 홀더에는 15명이 생활하고 있고, 대부분 당시 사건의 직·간접적 피해자들이거나 그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이다. 그 학교에는 자신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이들이 버젓이 교직원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정작 피해 학생들은 수년이 흐른 지금도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홀더에서는 현재 이들이 자립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사회적 기업 설립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김 목사는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 도중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교직원들의 성추행 행각에 대해 “하나의 ‘문화’였어요”라고 말했다.
김 목사가 ‘성추행’을 ‘문화’라고 스스럼없이 표현한 이유는 이렇다. 김 목사에 따르면 당시 그 학교에서는 학생이 어떤 잘못을 하면 교직원이 ‘너 한대 맞을래, 나하고 키스할래’라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제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졌다. 이런 행각은 개인의 사례가 아니었다. 학교 곳곳에 퍼진 ‘일반화’ 돼버린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김 목사가 말하는 당시의 그 학교는 소설 속 여자 주인공 서유진의 “여기 있다보면 그 상식이라는게 말이야...그게...없어”라는 중얼거림을 떠오르게 만든다.
“은밀한 곳에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다른 학생들이 지나가다가 쉽게 볼 수 있는 곳에서 버젓이 성폭행을 하곤 했어요.”
듣다보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흥분해서 따지듯 되물었다. ‘정신이 좀 이상한 한 명이 그런거라면 모를까, 어떻게 6명(인권위 조사 결과 가해자수, 피해자는 12명)이 한꺼번에 그럴 수가 있어요?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우연찮게 그 학교 직원으로 모인거라도 되나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라고.
김 목사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당시 조사 나온 인권위 사람들도 기자님하고 비슷한 소리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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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사람들의 가슴에 품어졌으면”
김 목사와 함께 만난 오재헌(51)씨는 홀더 운영위원이다. 김 목사와 더불어 피해 학생들을 가장 가까이서 보살피고 있다.
오씨는 “소설의 성공에 비해 피해 학생들에 대한 관심은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라며 아쉬워했다. 이번 영화를 통해서 만큼은 ‘아, 저런 일이 있었구나’라는 순간적인 안타까움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꼭 흥행에 성공을 해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는 동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기만 하다.
그는 “이 아이들은 사람들의 가슴에 품어져야 한다”며 “더 나아가 성폭력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모든 이들이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이 아이들이 치유되고 이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지난 5일엔 수개월째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고려대학교 의대생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 3명이 출교 조치됐다.
그러나 수년간 학교 안에서 청각장애 학생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자행해 온 가해자 6명 중 일부는 그 학교에 복직을 했다.
이처럼 가해자들의 말로는 다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항상 똑같다.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이 고통이 도무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트위터 @noon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