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방 보증금 빼가며 ‘정경아 사건’ 도운 이 사람

자기 방 보증금 빼가며 ‘정경아 사건’ 도운 이 사람

기사승인 2011-09-28 15:39:00

[쿠키 사회] ‘쇠고랑 안 찹니다. 경찰 출동 안 합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한 개그 프로그램 코너의 대사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안 한다고 쇠고랑을 차는 것도, 경찰이 출동하는 것도 아닌데 ‘저 사람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못 도와줘서 안달인 사람이 있다. 그냥 도와주는 것도 아니다. 사비를 탈탈 털어가며 보는 이들을 황당하게 만든다.

‘정경아 사건’ 물심양면으로 도와

모 법무법인 사무장으로 근무 중인 유규진(33·사진)씨는 최근 포털사이트 검색어가 될 정도로 화제를 모은 ‘정경아 사건 재수사’를 위해 정씨의 어머니 김모(61)씨를 도와 백방으로 뛰어다닌 사람이다.

법무법인에 근무하니 ‘돈 냄새 맡고 접근한 것 아니냐’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돈을 받기는커녕 자신이 사는 방 보증금 500만원까지 빼가며 김씨를 도왔다. 사비를 쓰다보니 휴대전화 요금이나 공과금을 못 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명 ‘정경아 사건’은 2006년 정경아(당시 25세)라는 여성이 지인이 사는 아파트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조사를 맡은 파주경찰서는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머니 김씨는 재수사를 요구하며 경찰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등 5년간 딸의 죽음만 붙들고 살았다.

유씨는 “김씨가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써놓은 사연을 우연히 본 뒤 적혀 있던 전화번호로 ‘어머니, 힘내세요’라고 그저 격려 문자를 보내드렸다. 그런데 10~20분 정도 있다가 전화가 와서 ‘누구시냐’고 묻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김씨는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고 싶었는지 얼굴 한번 못 본 젊은이에게 2시간가량 사건에 대한 내용을 털어놨다. 이후 유씨는 김씨를 만났다. 김씨는 부검사진을 포함, 사건 관련 서류 일체를 들고 나왔다. 유씨는 서류를 볼수록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은 유씨는 김씨에게 한 가지를 당부했다. ‘당시 경찰이 증거를 조작했느니, 누구와 결탁을 했느니 하는 근거 없는 추측은 일체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억울하면 괜히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계속 그랬다가는 모든 사건 관계가 다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유씨는 서류들을 몇 번이나 검토하고 사건 현장을 둘러보며 본격적으로 사건에 매달렸다.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 뒀다. 이 사건에만 매진하다보니 회사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씨는 “솔직히 회사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며 웃었다.

그는 사건을 추적하며 평소 알고 지내던 형사를 20명 넘게 만났다. 과연 재수사가 될 수 있는 사건인지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반응은 같았다.

유씨는 “다들 ‘5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니 정말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뒤집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며 “그러다보니 내가 좀 이상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다들 고개를 흔드는데 무턱대고 나서기만 하면 마치 사건청탁이나 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래서 사건의 의문점들을 정리한 책을 만들어 언론사, 청와대, 법제사법위원회, 각 지방경찰청 등에 보냈다.

수사 이의신청 3번 기각, 검찰청 고소 2번 각하 등 우여곡절 끝에 경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유족을 포함한 관련자들을 모두 불러 진술을 받기에 이르렀고, 언론에도 보도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일단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성공한 셈이다.

그는 ‘재수사를 해도 기존대로 자살로 결론나면 어쩌겠느냐’고 물어보자 “그렇게 되면 화나겠죠 뭐”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보니 음란전화 피해자들의 ‘수호천사’

그의 이런 조건없는 도움은 정경아 사건이 처음이 아니다. 유씨는 이미 수년전부터 ‘060 음란전화’ 피해자·업자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다. 다만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수호천사’로, 업자들 사이에서는 ‘저승사자’같은 존재인 것이 다를 뿐이다.

그가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수호천사’는 원래 060 음란전화 피해자들의 구제 사이트로 유명했다. 카페에 들어가면 060에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는 글들이 줄을 잇는다.

060 음란전화의 스팸광고 문자메시지 때문에 파경에까지 이른 부부를 보고 ‘저대로 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개설한 이 카페는 그동안 수천명이 도움을 받은 공간으로 발전했다.

실제 성과도 많았다. 이를 계기로 060 음란전화의 폐해가 언론에 다수 보도됐고, 이로 인해 이동통신사의 예방·차단 서비스도 출시됐다. 지금도 그는 언론이 음란전화 서비스와 관련된 보도를 하기 위한 필수 취재원이다.

유씨는 “한 번은 모르는 사람이 전화해서 ‘형님, 언제 식사 한 번 대접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하더라. 누구냐고 물어보니 060 음란전화 사무실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전화 끊고 해당 번호를 바로 스팸으로 등록해버렸다”며 웃었다.

그가 지난 4월 KT와 SK브로드밴드, 온세통신 등 3개 유선통신 사업자를 상대로 제기했던 ‘기간통신 불법사업 확인의 소’는 최근 기각됐다. 그는 060과 같은 사업에 회선을 빌려주는 것은 공공성을 명시한 정보통신사업법 위반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들 유선통신사업자는 웬만한 사람들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 로펌의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는 변호사도 없이 스스로 변론하며 맞섰다.

유씨는 “변론 때 분위기를 보며 기각될 거라고 예상했다”면서 “060이 얼마나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알렸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참 특이한 삶이다. 도대체 왜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자기 돈, 시간을 쏟아부어가며 남을 도와줄까.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고 물어보니 “팔자지, 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죠. 돈 많이 버는 게 행복한 사람, 직장에서 인정받는 게 행복한 사람, 가족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인 사람 등 말이예요. 나는 ‘정말 억울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가진 능력을 활용해 도와주고 작은 변화라도 이끌어내는 게 행복입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트위터 @noonker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김현섭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