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스타의 비극적 결말…故조성민, 어떤 선수였나

최고 스타의 비극적 결말…故조성민, 어떤 선수였나

기사승인 2013-01-06 10:58:01

"[쿠키 스포츠] 6일 유명을 달리한 故 조성민(사진·40)은 한때 국내 야구를 빛낼 최고의 재목 중 한 명으로 꼽힌 선수였다. 하지만 장밋빛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그의 야구인생은 굴곡의 연속이었고, 결국 ‘비운의 선수’라는 수식어와 함께 세상을 등졌다.

신일중·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조성민은 고려대에 입학하면서 일찌감치 ‘대한민국 에이스’로 성장이 기대되는 스타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그는 박찬호, 임선동 등과 함께 이른바 ‘공포의 92학번’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성민은 지난 1994년 열렸던 제32회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조성민과 함께 임선동, 문동환, 심재학, 손민한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한 한국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8강 정도일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한국 대표팀은 준결승에서 만난 일본을 9-0으로 완파하며 국내 야구팬들을 열광시켰다.

1996년 대학을 졸업한 조성민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계약금 1억5000만엔을 받고 입단했다. 1998년부터 1군 선발로 본격 활약하기 시작한 조성민은 그해 6월까지 7승으로 다승 공동 1위에 오르는 등 투수 각 부문에서 상위에 올랐고 완봉승 3번, 완투승 2번 등 괴력의 역투를 선보이며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떠올랐다. 이때가 그의 야구인생 최고의 황금기였고, 그의 ‘비상(飛上)’을 의심하는 전문가는 없었다.

그러나 이후 부진이 이어졌고 이렇다 할 활약을 더 이상 보여주지 못하던 그는 2002년 요미우리를 떠났다. 4시즌 11승 10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2.84. 그가 남긴 일본 프로야구 통산 성적이다.

그가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지난 2000년, 당시 최고의 스타 배우였던 최진실씨와 결혼하면서다. 5세 연상연하 커플인 이들의 결혼은 언론에서 ‘세기의 커플’로 불릴 정도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불화설이 터져 나왔고 결국 2004년 파경을 맞았다. 그 과정에서 폭행 논란 등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야구 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며 제2의 인생을 펼쳐나가려 했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2003년과 2004년에는 연달아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 신청서를 제출하는 등 ‘야구선수 조성민’으로의 복귀를 꿈꿨고, 2005년 김인식 전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에 깜짝 입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조성민은 볼 수 없었다. 이미 전성기가 지나가버린 그는 한화에서 2007년까지 3년 동안 35경기에 출장해 3승4패와 평균자책점 5.09라는 평범한 성적을 남긴 채 다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트위터 @noon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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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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