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큰 키에 작은 얼굴, 개성 강한 이목구비까지. 독특한 분위기가 감도는 배우 이민기는 유난히 특이한 캐릭터를 많이 소화했다. 때문에 그를 떠올리면 비현실적인 판타지 느낌과 배우로서의 신비함이 공존한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21일 개봉한 영화 ‘연애의 온도’에서는 현실로 성큼 뛰어들었다. 이 영화는 사랑의 단맛을 보여주는 멜로가 아닌 쓴맛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작품. 3년간 비밀연애한 사내커플 이동희(이민기)와 장영(김민희)이 이별 후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리얼하게 담았다.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적인 극적요소 없이 담담하게 한 커플을 바라보는 점이 특징이다.
이민기는 다혈질에 아이같이 유치한 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순수함과 따뜻함을 지닌 이동희로 분해 김민희와 호흡을 맞춘다. 리얼한 연기를 고수하는 김민희와 만나서인지 ‘진짜’ 현실 속 은행원 같은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냈다.
지난 15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영화 홍보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민기를 만났다. 영화 속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더니 그는 어느새 영화 속 이동희가 돼 극 중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 이런 연애를 경험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헤어진 누군가를 다시 만났던 적이 없어요. 때문에 옛 경험을 떠올리며 연기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시나리오를 보면서 제 안에서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만들어졌어요. 어떤 시나리오를 보면 눈물이 나거나 너무 아플 때가 있는데 이 영화는 ‘그래, 그렇지…’ 같은 느낌이 들면서 빠져들었어요. 누군가가 만들어준 감정이 아닌 제 안에서 제가 모든 감정을 만들어내는 느낌이었죠.”
작품을 택할 때는 전작과 같지 않은 장르, 독특함이 있는 캐릭터를 우선시한다. 전작 ‘오싹한 연애’에 이어 또다시 멜로를 택했지만 기존의 멜로 영화와 다른 ‘연애의 온도’가 가진 독특함 때문이었다.
“‘오싹한 연애’ 이후라 다른 장르를 하고 싶었는데 이 영화의 독특함에 매료됐어요. 기존의 멜로물이나 로맨틱코미디를 보면 현실에 없는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뻔한 이야기를 뻔하게 그렸기 때문에 그 점이 새로웠어요. 현실의 멜로이고 나와 너의 멜로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고민 없이 택했습니다(웃음).”
현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영화적 재미의 미덕’이 없다는 면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의 생각은 어떨까.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것 자체로도 제 작품에 대한 대견함이 있어요. 영화를 영화적으로 보러오는 분도 있겠지만 영화가 가진 감성 자체를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이 영화는 공감대가 중요한 작품이에요. 감정을 관객에게 주입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 울거나 화내는 분들이 있어요. 보는 이의 배경이나 감정에 맡겨 두는 거죠.”
영화를 보다보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차가운 공기의 온도나, 미묘한 감정선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 장면일 뿐이지만 관객의 기억 속 추억들을 끄집어내 더 깊이 공감하게 한다. 남자 이민기로서 이동희와 장영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까.
“일단 사내연애를 해본적이 없지만,몰래 하는 것에 대한 짜릿함이 있으니 스릴 있을 것 같기는 해요. 많은 사람들 중 둘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생긴다는 점에서 더 소중하고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또 일부 장면이 아닌 영화 속 모든 장면을 공감했고 이해했어요. 남자 여자로 바라본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본다면 둘의 입장을 당연히 이해하죠. 그러나 이해는 하지만 화가 날 때가 있잖아요. 그런 부분 때문에 싸우는 것 같아요. 어쩌면 스스로에게 내는 화일지도 모르고요.”
멜로 영화를 연이어 두 편이나 했지만 현재 그는 연애를 하지 않고 있다고. 왜 연애하지 않는지 묻자 “안 하는 게 아니고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하는 게 아니고 못하고 있어요. 연애를 안 할 이유는 없죠. 그런데 아무래도 누군가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또 요즘 시대가 워낙 흉흉해서… 더 신중히 만나려고 해요.”
연애 말고 그의 고민은 ‘배우 이민기’의 정체성이다. 매번 다른 장르를 택하고자 하는 것도 정체되고 싶지 않아서다. 모르는 분야의 것을 시도할 때 더욱 열심히 노력하게 되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기하는 제 모습이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다른 배우들과 차별화 되지 않고 비슷비슷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 때요. 예를 들어 어떤 장면이 있으면 10명 중 9명의 배우는 비슷한 생각을 할 거예요. 그럴 때 뭔가 다른 한가지 생각을 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제가 그런 능력을 가진 배우인지 아닌지 의심 들 때 스스로 힘들죠.”
그런 이유로 늘 정형화된 것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스스로를 가둬두려 하지 않고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도전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어도 3번 이상 보지 않는다.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갇혀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제가 잘 될수록 가둬두려 하는 것 같아요. 유명해질수록 여러 가지 활동제약이 생기는 것처럼요. 하지만 저는 더 풀어지고 유연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 중 하나로 저는 제 작품을 많이 보지 않아요. 제가 보는 제 모습에 갇힐 것 같아서요. 저 자신을 잊고 열어두는 게 가장 행복해지는 방법인 것 같아요. 배우 이민기로서도, 사람 이민기로서도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한지윤 기자 poodel@kukimedia.co.kr / 사진=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