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여의도 직장인들 ‘멘붕’ 빠뜨린 야반도주 사건

[친절한 쿡기자] 여의도 직장인들 ‘멘붕’ 빠뜨린 야반도주 사건

기사승인 2013-07-24 16:11:00


[쿠키 사회] 장기 불황의 찬바람에 예외인 곳은 없나 봅니다. 대한민국 ‘금융의 메카’ 여의도에서 인근 직장인들이 ‘발칵’ 뒤집힌 ‘야반도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기자가 소식을 듣고 가본 곳은 여의도 기계회관 건물 지하에 있는 ‘웰플러스’ 휘트니스 센터. 24일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바깥에는 간판도 그대로고 문 앞에 서 있는 ‘연회원 가입시 제주도 2인 왕복항공권을 드립니다’라는 프로모션 입간판도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안은 말 그대로 ‘휑’했습니다.

들어가보니 20대~30대로 보이는 여성 2명, 남성 1명이 안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인 듯 했고, 그 중 여성 1명이 피해 회원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은 지난주까지 와서 운동을 했고, 주말에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긴급 전기점검으로 휴무를 한다’는 문자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폐업을 한다며 락카에서 짐을 빼가라는 문자가 왔다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려고 하자 “난 어차피 회원권 기간이 거의 다 돼서 피해액도 얼마 안 된다”며 서둘러 나갔습니다.

혼자서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책상에 전화는 그대로 연결이 돼 있더군요. 혹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자가 “여보세요”하고 받아보니, 세상에나, “회원 가입 문의 좀 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기자라고 말해주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 준 후 “운 좋으십니다. 며칠만 빨리 전화하셨어도 당하셨을지 모릅니다”며 농담 아닌 농담을 하니 상대방도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네, 알겠습니다”하고 끊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회원명부 등 서류들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넘겨보니 피해 회원 수가 어림잡아 700~800명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 인근의 여의도 직장인들이고 국회 관계자에 연예인까지 있었습니다. 이 센터는 헬스, 골프, 필라테스를 취급합니다. 회원권 기간에 따라 피해액이 적게는 10만원대에서 많게는 100만원은 되겠더군요.

락카 쪽으로 가보니 인근 회사에 다닌다는 30대 남성이 짐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헬스 6개월을 끊었다고 하는데 3개월을 손해 봤다고 합니다. 이 남성은 “처음 왔을 때 강사가 8~9명 정도는 돼 보였는데 최근 들어 3~4명밖에 안 보였고, 일부 운동기구나 선풍기가 훼손돼 있는데 계속 고쳐지질 않아서 좀 이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도망갈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전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30분 정도가 지나자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 피해 회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다들 들어서자마자 “어, 이게 뭐야?” “세상에” “난 지난주 금요일에 회원 끊었다. 이건 명백한 의도적 사기다”라는 등 허탈함과 황당함에 한마디씩 던졌습니다.

“회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던 여성 트레이너가 1개월 전에 갑자기 없어졌다. 그때 눈치 챘어야 하는데” “사실 회사 후배가 요새 불황이라 갑자기 폐업하는 곳 많으니 조심하라고 조언해줬는데 ‘다른 곳은 다 그래도 여의도는 그럴 일 없다’며 회원권을 끊었다. 그 후배 말 들을 걸 그랬다”라는 등 피해자들끼리 웅성거리며 사연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이어 한 손에 담배를 든 40대 남성이 들어오며 회원 명부를 넘겨보고 있는 기자에게 “누구냐”고 물어왔습니다. 상당히 표정이 안 좋았고 한 눈에 봐도 피해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자라고 밝힌 후 사연을 물어보니 이 분은 피해 회원도 아닌 ‘피해 투자자’였습니다. 지난해 3월부터 9월까지 이 곳에서 강사로 근무했고 5000만원을 투자했다고 합니다. 돌려받은 돈은 2000만원뿐이라고 합니다.

다른 40대 남성이 들어와서 물어보니 이 분은 무려 2억원을 투자했다고 합니다. 돌려받은 돈은 한 푼도 없다고 합니다.

피해를 본 건 투자자, 회원들 뿐만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도 센터를 지키고자 꾹 참고 일해왔다는 직원들도 머릿 속이 멍해지긴 마찬가지입니다.


현장에 다녀온 후 컴퓨터 앞에 앉아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불황 야반도주’라고 쳐봤습니다. 공장, 요가·헬스장, 원비 낼 돈 없는 고시원생, 입원비 없는 병원 환자, 월세 낼 돈 없는 식당 주인 등 최근의 야반도주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투자자들에 따르면 이 웰플러스 사장이 1977년생이라고 합니다. 무턱대고 사장만 비난하기보다는 이렇게 젊은 사람이 야반도주까지 해야 했던 삭막한 현실을 탓하고 싶다가도, 속아서 한숨쉬고 있는 피해자들을 보면 그러기도 미안합니다. 여하간 장기 불황의 찬바람에 사라져버린 대한민국의 봄이 빨리 다시 왔으면 좋겠습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트위터 @noon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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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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