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감이라는 키워드로 1990년대 국내 문학계에서 주목받았다면, 영화계의 주역은 단연 중국 감독 왕자웨이였다. ‘아비정전’(1990) ‘동사서독’(1994)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화양연화’(2000)는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과 가만히 떠나가는 사랑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그려 젊은 관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동사서독’은 이 가운데 가장 불친절한 작품이다. 진융(김용·金庸)의 무협소설 ‘영웅문’을 원작으로 삼았지만, 원작과는 달리 스토리는 파편화돼 있다. 황약사, 구양봉, 홍칠공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하나 이야기가 딱히 연결되지도 않는다. 유일하게 연결되는 건 실연의 감정이다. 사랑에 실패한 인물들의 지독한 고독만이 영화의 중심을 꿰뚫는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