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신생 영화제작사 ‘위더스필름’의 최재원(47) 대표에게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대학생들을 만나보니 취업 이외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절체절명의 과제인 취업 말고는 세상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후배들에게 과거 선배들의 치열함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칫 교조적이고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 있어 고민 중이었다.
2012년 봄, 대학 후배인 시나리오 작가 양우석(45) 감독을 만났다. 양 감독은 오래전부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웹툰으로 기획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토론 끝에 이 이야기를 웹툰이 아닌 영화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영화 ‘변호인’은 이렇게 시작됐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제작자를 찾아가 설득한 것도 아니고, 제작자가 의도를 갖고 감독을 만나 기획한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저 요즘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신인 감독이 만드는, 정치적 논란을 피할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시나리오 ‘변호인’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스스로 길을 찾았다. 송강호를 비롯한 탁월한 배우들을 만났으며, 투자배급사를 만났다. 홍보조차 자연스러웠다. 입소문을 탄 영화에 관객이 몰렸다. 영화는 화제를 몰고 다녔고 관객들의 감상평이 쏟아졌다. ‘변호인’은 이번 주말쯤 1000만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 굵직한 작품에 투자해 온 최 대표였지만 제작사를 차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본격 상업영화는 ‘변호인’이 처음이다. 양 감독 역시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양 감독이 노 전 대통령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8년 5공 청문회 때다. 초선의원이던 노 전 대통령이 청문회에서 5공 인사들에게 할 말 다하며 호령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누구나 한번쯤 그동안 살아온 가치관을 뒤흔드는 폭풍 같은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노 전 대통령도 그랬다. 돈이 전부였던 세무전문 변호사에서 우연한 기회에 국가보안법 사건을 맡게 된 후 가치관이 변했다. 이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지켰다.
감독이 주목한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하지만 2002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시나리오를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아야 했다. 자칫 용비어천가가 될까봐 영화화 자체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가 개봉 후 처음으로 지난주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사이렌’일 뿐이다. 사람들을 일단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 수는 있지만 직접 불을 끄거나 사람을 구조하진 못한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들이 무언가 세상에 도울 일이 생겼을 때, 행동이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 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변호인’뿐 아니다. 요즘 한국영화는 사회를 품고 있다. 지난달 개봉한 ‘집으로 가는 길’은 보호받아야 할 국가에 버림받은 국민의 이야기로 공감을 샀다. ‘변호인’과 함께 쌍끌이 흥행 중인 ‘용의자’는 남북관계를 다뤘다. 화려한 액션도 볼거리지만 주된 줄거리는 특수요원 출신의 탈북자가 딸을 찾고자 벌이는 사투와 여정이다. 왜곡된 남북관계를 조명하는 동시에 국가정보원의 치부도 드러낸다.
개봉을 앞둔 ‘살인자’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을, ‘찌라시: 위험한 소문’은 근거 없는 소문으로 사회를 뒤흔든 증권가 정보지를 소재로 했다. 사회를 품은 한국영화는 오락적 재미뿐 아니라 공개토론장의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