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숲길을 걸을까. 건강 유지와 체력단련, 마음의 평정을 찾기 혹은 요즘 유행하는 힐링, 자연과의 교감, 또는 철따라 바뀌는 숲의 풍광 감상, 역사와 국토지리 등 인문적 소양의 함양,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늘리기, 하산 후 뒤풀이의 즐거움…. ‘그 숲길 다시 가보니’ 연재는 그 중에서도 자연과의 교감에 초점을 맞췄다. 그 교감을 확대하려면 풀과 나무, 그리고 숲 생태계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더 많이 알수록 자연을 더 사랑하게 된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우리의 국토와 생태계가 잘 보전되고, 욕망의 순화를 통해 사람 사이, 즉 사회에도 신뢰가 쌓인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도 더 가까워질 것이다.
지난달 말 숲길 걷기를 앞두고는 스스로 품고 있던 우선순위가 잠시 뒤죽박죽이 됐다. 먼저 4월16일 세월호 참사는 나무와 꽃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키고, 반감시켰다. 그 어떤 대형사고보다도 더 처참했고, 그걸 보는 우리 모두가 무기력했던 충격에 무겁게 짓눌린 마음으로 4월의 하반기를 보냈다. 그 사이 부쩍 빨라진 기후변화의 발걸음은 예쁜 꽃을 피우는 장미과 교목들의 낙화를 재촉했다. 주중에 몸과 마음이 참사 속보에 사로잡혀 있다가 주말에 북한산에 가면 어떤 곳에선 산벚꽃과 귀룽나무 꽃이 각각 한 주 차이로, 얼굴 한 번 안 보여준 채 지고 말았음을 깨달아야 했다.
4월 19일에는 북한산 주능선과 중턱에 산벚꽃과 진달래가 만발해 있고, 산 밑에는 벌써 다 졌다. 복사꽃도 지기 시작했다. 삼천리골 초입에는 귀룽나무 꽃이 벌써 만발했다. 마음이 다급해져서 전국의 산을 다니는 한 식물학자에게 물어 봤다. “올해 개화가 계속 열흘이나 보름 정도 빠르네요. 태백산에서도 벌써 산벚꽃이 만발했으니 다음주중에는 그 남쪽으로는 다 지고 없을 겁니다.” 4월 마지막 주 27일이나 28일 울진 금강송 숲길에 가려고 했는데 그 추세대로라면 귀룽나무 꽃도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팥배나무는 꽃 피기에 조금 이르고….
다른 일정들 때문에 출장을 앞당기기도 곤란한 상태였다. 그래, 눈에 확 띄는 꽃이 없어도 키 작은 나무와 풀들이 꽃을 피워내겠지. 무엇보다도 다른 장소를 생각할 겨를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26일에는 북한산 포금정사 터에서 귀룽나무 거목들이 털어내는 밥풀 크기의 앙증맞은 흰 꽃잎들이 성긴 눈처럼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아직 봄은 가지 않았다고 우기는 듯 착지를 망설이면서 한참 동안 공중을 떠다녔다. 27일부터 전국에 비가 내렸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다 보니 29일에야 서울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탐방예약제로 운영되는 금강송 숲길은 계곡이 범람하는 바람에 통제됐다고 전화가 왔다. 다른 곳을 생각하다가 오대산 옛 숲길(선재길)은 해발 800~900m대의 고지대이기 때문에 꽃이 매우 늦게 피고, 단풍은 일찍 든다는 팁이 그때서야 떠올랐다. 행선지를 오대산으로 변경했다. 영동고속도로가 해발고도를 높여 평창 구간에 접어들자 도로 변에 아직 산벚꽃이 피어 있다. 예감이 좋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월정사 방향으로 막 향하는데 하늘에 큰 무지개가 걸렸다. 아치 모양이 온전히 살아 있는 선명한 무지개는 세월호 참사로 시름에 빠진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서광으로 느껴졌다.
나무와 풀들이 쑥쑥 자라는 5월을 흔히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멀리서 본 산의 모습이 초록부터 연두까지 농담(濃淡)의 다양한 편차를 펼쳐 보이는 때 말이다. 그러나 ‘계절의 여왕’ 왕관은 기후변화 탓에 5월에서 4월 중·하순으로 넘어갔다고 해야 할 것이라는 얘기들이 나온다. 실제로 북한산에서는 4월 하순부터 신갈나무 잎이 커졌고, 그 색깔이 연두색에서 녹색으로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대산에서는 신갈나무 잎이 아직 나지도 않았거나 애기 손가락만 했다. 오대산이나 그만큼 높은 산에서는 5월이 상당 기간 계절의 여왕으로 남을 것이다.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도열한 ‘천년의 숲길’부터 걸었다. 이름이 말해주듯 오래 된 숲의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다. 전나무는 속성수라서 다른 나무에 비해 빨리 자라고 키도 크다. 이곳의 전나무1100여 그루는 평균 높이가 24m에 이른다. 가슴높이 직경은 최대 116㎝, 평균 60㎝다, 그러나 나무 재질이 단단하지 않기 때문에 비바람에 잘 쓰러지고, 벼락도 잘 맞는다. 이 숲에서 가장 오래 된 ‘할아버지’ 전나무의 생전 나이는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2006년 벼락을 맞고 죽은 뒤 누워 있다. 이렇게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면 초록 이끼들이 나무를 뒤덮고, 버섯이 피고, 벌레와 곤충들이 집을 짓는다. 나무는 점점 분해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한 나무가 사라지지만, 더 많은 풀과 나무가 다시 숲을 빼곡하게 채운다. 4월에 피는 전나무 꽃은 소나무과 나무들 가운데 가장 탐스럽고 예쁘다. 그러나 피어 있을 때가 지났다고도 하고, 또한 주로 높은 곳에 피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다고 한다. 전나무는 적응력이 강한 소나무와 달리 도시에 가까운 산에서 버티지 못하고, 깊은 산 속에서 살아간다. 현실적이진 못하지만, 지조가 강한 선비를 연상시킨다.
약 900m에 이르는 천년의 숲길과 월정사를 지나 다시 1㎞를 지나면 선재길의 초입에 다다른다. 여기까지 구간에도 돌배나무, 귀룽나무, 처진개벚나무, 명자나무 등의 꽃들이 보인다. 장미과 나무들의 꽃은 보통 잎보다 먼저 피고, 꽃잎이 5장이다. 갈래꽃받침이어서 꽃잎이 낙화할 때 한 장씩 흩어져서 떨어진다. 피어있는 기간도 보통 일주일 안팎이고, 길어야 열흘 정도다. 그래서 꽃이 질 때의 모습이 화려하면서도 어쩐지 좀 슬픈 구석이 있다. ‘아 행복의 끄트머리가 흐지부지된들 어떠리/어느 봄날 저녁/뭇벚꽃으로 환하게 흩날린들/…’ (황동규, ‘꽃이 질 때’ 중에서)
선재길은 입구에서 상원사까지 오대천을 좌우로 가로지르며 8㎞ 가량 이어진 옛길이다. 선재는 ‘선재동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이후 이곳 오대산에 비포장 관통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수도승들이 걷던 길이다. 몇 년 전부터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길을 정비해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대체로 호젓하고 울창한 숲길이지만, 옛 화전터, 식민지 시대 깊은 산 속에서 베어 낸 나무를 운반하기 위해 깔았던 철길의 흔적, 일본잎갈나무 조림지, 지역 노인회의 텃밭 등 다양한 배경을 만날 수 있다.
초입부터 막 피어난 귀룽나무 꽃들이 반갑다. 장미과 벚나무속이며, 흰 꽃이 지름 1.5㎝ 정도로 매우 작은 편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룡목(九龍木), 귀롱나무, 구름나무 등이 있다. 연초록 잎이 먼저 나고, 약 3주후 하얀 꽃이 무더기로 모여 피는 것이 구름을 닮았다고 해서 북한에서는 구름나무라고 부른다. 멀리서 보면 흰 꽃이 자두나무 꽃처럼 연두색으로 보인다. 산벚나무 꽃잎이나 귀룽나무 꽃잎이 계곡 물 고인 곳이나 못 쓰는 우물(폐정)을 촘촘히 뒤덮고 있는 모습은 빠뜨릴 수 없는 봄의 절경이다. ‘…/누가 불행하다고/가고 있는 붐 한 철에 기대랴/우리가 잃어버리는 것투성이니 많이 잃고도/하나도 잃지 않은 저기 폐정된 우물/들여다보면 어둑한 물 위로 낙화/물풀처럼 떠돈다/가버리면 봄이었다는 생각이/갈 길 새삼 낯설게 한다.’ (김명인, ’낙화‘ 중에서)
귀룽나무 꽃과 함께 자주 눈에 띈 장미과 나무의 꽃이 산돌배 꽃이다. 열매인 산돌배는 지름이 3~4㎝로 개량된 배보다 훨씬 더 작고 맛도 없지만, 기침, 담, 변비에 좋은 효과를 내는 약이다. 최근 돌배의 효능과 독특한 향이 알려지면서 술이나 즙의 가공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보통 10m까지 자라지만, 경북 울진군의 쌍전리 산돌배나무는 키가 25m, 수령 250년으로 천연기념물 408호로 지정돼 있다. 진달래와 고로쇠나무의 연한 황록색 꽃도 피었다. 산벚나무는 꽃이 다 졌지만, 주변을 온통 분홍빛 꽃잎들로 수놓았다. 철쭉은 필 때가 아직 아니지만, 성질이 급한 한 개체가 4~5송이의 분홍 꽃을 피웠다. 고도차에 의한, 시간차 꽃구경을 한 차례 더 하는 호사를 누린다.
비가 며칠 내리는 바람에 일부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서 갔던 길을 도로 나와서 승용차로 다음 구간까지 이동하기를 두 차례 거듭했다. 나뭇가지들을 엮어 임시로 만든 섶다리도 건넜다.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도록 만든 다리다. 그러나 오대산장부터 상원사까지 가는 3.6㎞ 구간에는 출렁다리 등이 새로 연결돼 있어서 기분 좋게 계속 걸을 수 있었다. 거제수, 까치박달, 박달나무, 서어나무 등 자작나무과 활엽수들이 우점하고 있는 극상림(極相林)이다. 극상림이란 오래 되어 생태계가 매우 안정된 숲으로 숲의 천이(遷移)에서 마지막 단계이다. 피나무, 물푸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난티나무, 쪽동백나무, 가래나무, 노린재나무, 음나무, 다릅나무, 야광나무 등이 고루 분포했다. 피나물, 동의나물, 긴개별꽃, 양지꽃 등 야생화도 보였다. 스폰지처럼 푹신푹신한 부엽토, 그 위에 낙엽송이 깔린 길은 몸도 편안하게 해 준다.
어설픈 요령으로 대략 장미과, 콩과, 소나무과, 자작나무과, 참나무과 등 5가지 과의 나무들을 익히면 급한 대로 우리나라 산의 나무들을 대부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단풍나무는 잎만 보면 알 수 있다. 이걸로 아쉬우면 개체수가 많은 물푸레나무과, 종이 많은 인동과 등 2가지 과를 더한다. 물푸레나무과에는 개나리, 미선나무, 이팝나무, 정향나무 등이 있다. 인동과에는 병꽃나무, 덜꿩나무,인동덩굴 등이 있다. 분류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문법을 알아야 외국어를 쉽게 배우듯이 분류기준을 알면 더 많은 식물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오대산국립공원에는 우리나라에서 설악산국립공원 다음으로 많은 고산식물이 자라고 있다. 주목, 분비나무, 전나무 등 아고산 생태계를 대표하는 식물군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정상 정복을 염두에 둔 수직탐방보다 선재길 등 상대적 저지대를 걷는 수평탐방을 하는 게 좋다. 안전한 수평탐방은 체력에 무리도 가지 않고, 다음 세대와 자연을 배려하는 산행문화의 기초가 된다.
오대산 선재길 걷기는 꽃구경의 즐거움보다는 힐링, 즉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과정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오래 된 숲이 주는 치유의 힘일 것이다. 이제 곧 입하다. 그러나 월정사 경내의 고로쇠나무에 걸린 노란 리본들이 기원하듯 끝까지 살아남고자 했던 세월호 희생자들의 봄꽃 같은 염원을 담아 올해 이곳 고지대의 봄은 언제까지나 머무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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