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유럽 한달] 14. 호르겐-비오는 날엔 해물파전이지

[무작정 유럽 한달] 14. 호르겐-비오는 날엔 해물파전이지

기사승인 2016-04-04 17:34:56

[쿠키뉴스] 호르겐에서의 마지막 날. 사비나와 카린이 준비한 스위스식 아침을 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의논합니다. 어떤 걸 좋아하는 지 묻길래 “글쎄… 뭔가 스위스 다운 풍경?”라고 대답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너무 막연하다는 거죠. “그럼… 알프스 설산?”라고 했더니 먼저 근처 라퍼스빌(Rapperswil)을 들렸다 차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고 합니다.

취리히 호수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라퍼스빌은 ‘로즈타운’으로도 알려진 곳입니다. 구시가지와 고성, 장미정원과 호수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곳이지요. 호르겐에서는 무척 가깝고 취리히 중앙역에서도 기차로 30분이면 도착하는 곳입니다. 중세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지녔고 까페와 레스토랑도 많아 현지인 역시 자주 놀러 오는 곳이라고 합니다.

‘장미의 마을’로 알려진 이곳은 고성 아래 로즈가든에서 수 십가지가 넘는 다양한 장미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5~10월에 걸쳐 피기 때문에 일 년의 절반은 장미를 볼 수 있답니다. 라퍼스빌은 스위스에서 가장 긴 목조 다리로도 유명합니다. 허든지역과 라퍼스빌을 연결하는 다리인데요. 취리히 호수를 가로지르는 나무 다리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루돌프4세가 1358년부터 1360년까지 만든 다리입니다.

물론 현재의 다리는 최근에 다시 만든 것이지만 루돌프 4세가 지은 나무 다리는 1878년까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2001년 4월에 다시 건설된 다리는 폭이 2.4m, 길이는 841m로 걸어서 건너는 데 30~40분이 소요됩니다. 날씨가 좋으면 만년설이 쌓인 센티스 산도 볼 수 있다니 산책 삼아 걸어도 좋은 곳입니다.

고풍스러운 구시가는 단연 언덕이의 고성이 가장 눈에 띕니다. 13세기에 지어진 고성은 1870년부터 Polish National Museum으로도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요즘은 고성에서 결혼식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언덕 위 고성에 올라가니 취리히 호수부터 시내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경치가 시원합니다. 고성벽 아래에서는 와인을 만드는 포도밭도 있고 장미정원도 한 눈에 들어옵니다. 장미정원으로 가는 골목길에는 작은 장터가 열리는데요. 아기자기한 귀여운 소품부터 신기한 공예품, 허브제품, 미술품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팝니다. 장미정원에서는 야외 낭독회 모임이 있나봅니다. 장미꽃밭 안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차분한 목소리로 시를 읊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호숫가 젤라또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들고 차로 향합니다. 사비나는 계절이 아직 일러서 눈 덮인 산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우리는 푸르른 초원을 실컷 보면서 드라이브 하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설산을 보러 가는 길에 유명한 수도원이 있었지만 이날 야간기차를 타고 크로아티아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시간에 쫓겨 겉에서만 봐야 했던 게 조금 아쉽기는 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검은 성모마리아 상으로 유명한 스위스 최대의 순례지였다고 하더군요. 이름은 아인지델른베네딕토회 수도원(Benedictine Abbey of Einsiedeln). 937년에 세워졌으며 수도원 주위로 도시가 발전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수도원 안의 검은 성모마리아 나무상은 수세기를 지나오면서 양초에 그을려 검은색이 띠게 됐다고 합니다.

1시간이 넘게 쉬지 않고 달리니 어느덧 질호수(Sihlsee)에 다다릅니다. 보통 여기까지 오면 설산을 볼 수 있지만 이날은 머릿속에 그리던 알프스의 풍경은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보다 더 실망한 사비나는 다른 산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지만 여유롭게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집니다. 다들 창밖을 보며 침묵을 지킵니다. 스위스의 마지막 날이라 안 그래도 마음이 어두운데 비까지 내리니 다들 조금씩 기분이 가라앉나 봅니다.


“비오는 날엔 파전인데....” 혼자 중얼거리다가 문득 김치를 담고 남은 파 생각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혹시나 싶어서 집에 가는 길목에 있는 편의점엘 들렀더니, 유레카!
냉동 모듬 해물이 있는 게 아닙니까! 집에 돌아와 신나게 해물파전을 굽고 어제 몇 장 남겨두었던 배춧잎으로 배추전을, 호박을 잘라 계란물을 입혀 호박전도 굽습니다. 식탁 가득 한국음식을 올리고 호르겐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즐깁니다. 해물파전과 각종 채소로 만드는 한국식 팬케이크에 두 스위스 처녀들은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해물파전집을 하면 대박이 날 거라며 남김없이 싹싹 먹어 치우는 두 친구들을 보니 마냥 고맙고 행복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한국에서 들고 온 보이차를 우려주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랩니다.

어김없이 떠나야 할 시간이 찾아오고 우리는 캐리어를 들고 취리히 중앙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갑니다. 자신들의 침대까지 내어주고 일정도 바꿔가며 함께 해준 스위스 친구들과 진한 포옹을 합니다. “이젠 너희들이 한국에 올 차례인 거 알지? 언제든 내 침대를 양보할게.” 유독 짧았던 일정이기에 아쉬움이 더 크지만 다음 만남을 또 기약하는 수밖에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기차는 힘차게 출발합니다. ‘고마웠어 사비나, 카린…’ 어둑어둑한 창 밖을 보며 한참 동안 손을 흔들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글·사진 | 이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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