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 한국적인 이미지, 한국적인 미학, 한국적인 미의식,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 등등 그동안 한국성을 반영한 미의식의 실체에 대한 숱한 논의가 있었지만 좀체 그 가닥은 잡히지가 않았다. 혹자는 그 논의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자가당착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그 논의로 이득을 볼 심산이 아니라면(그래서 최소한 그 저의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아니라면) 아예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고도 한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말일 수 있겠다.
여기에는 원형과 전형에 대한 착각도 한몫을 했다고 본다. 여기서 전형은 공공연하게 사회적 합의에 이른, 그래서 충분히 기호화되고 언어화되고 의미화 된 지점을 말한다. 이를테면 특정 문양과 특정 색채와 특정 색채감정과 특정의 상징적 의미로 굳어진 것과 같은. 이에 반해 원형은 기호와 언어와 의미 이전의 재료 내지는 원형질 같은 것으로서, 전형과 같은 결정적인 표상형식을 갖는 것은 아니다. 원형은 몸 언어에 속하고, 그 몸 언어가 상징적 의미를 얻으면서 특정의 의미로 결정화된 것이 전형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결국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몸 언어에서 찾아지는 것이 관건일 수 있겠다.
여기에 온몸(작가의 몸이 아니라 작업의 몸)으로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을 발산하는 작가가 있다. 바로 유휴열이다. 비록 작가가 처음은 아니지만 유독 그렇고 두드러지게 그렇다. 그렇다고 작가가 먹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산수를 그리지도 않는다. 전통적인 소재에 천착하는 것(소재주의)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은 작가의 온몸에서 차고 넘친다.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에선 샤머니즘과 토테미즘과 애니미즘, 범신론과 물활론과 같은 전통적인 민간신앙의 영적 존재들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합치된다.
단청색과 오방색과 색동색, 백색과 흙색 그리고 쪽빛 같은 전통적인 색채감정이 그 경계를 넘어 하나로 합체된다. 신명과 한, 흥과 살풀이와 같은 전통적인 정서 혹은 혼이 그 경계너머로 합치되고 합체된다. 그 합치와 합체는 의식적인 차원을 넘어 무의식적인 지경에 이르고, 계획의 차원을 넘어 부지불식간의 경지에 이른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획하고 의식하는 능동적인 차원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저절로 얻어지는 수동적인 차원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형식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모든 형식을 아우르면서 넘어서는 비 혹은 탈 형식 쪽으로 옮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새 작가의 인격이 되었고, 예술혼이 되었고, 형태가 되었고, 색깔이 되었고, 말투가 되었고, 생활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이 각각 생(生)놀이와 추어나 푸돗던고로 나타난 주제다. 각각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주제의식으로서, 사실상 작가의 전작을 두루 아우르면서 넘나드는 인문학적 배경으로 보면 되겠다. 이에 의하면 작가는 작업을 무엇보다도 타고난 건강한 생명력의 분출이라고 본다(바이털리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자기본능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본다(프로이트라면 리비도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놀이라고 본다. 굳이 작업이 놀이가 아니라, 이미 삶 자체가, 생 자체가, 태어난 이유 자체가, 살아가는 이유 자체가 놀이라고 본다.
작업이란 결국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자기본성을 실현하는 과정인 것이며, 그 자체며 전체가 놀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과정에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작업과 놀이와 본성과 삶이 경계 없이 살아지는 경지에 다름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추어나 푸돗던고가 뭔고 하니 춤이나 추어 풀어보자는 의미의 고어라고 한다. 작가의 그림엔 유독 춤사위를 그린 그림들이 많다. 딱히 춤사위를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러저런 몸 사위를 암시하는 것들이 많다. 사실상 가만히 있는 것들, 정적인 것들, 정태적인 것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왠지 움찔움찔하는 것 같고 꿈틀꿈틀하는 것 같다. 춤이 뭔가. 푸는 거다. 비비 꼬인 걸 푸는 거고, 얽히고설킨 걸 푸는 거고, 꽉 막힌 걸 푸는 거다. 카타르시스다. 서먹서먹한 관계를 풀어서 동(통)하게 한다는 점에서 보면 소통이다.
결국 작가의 작업에서 춤사위와 몸 사위와 붓 사위는 그 경계 너머로 하나로 통한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자기의 본성(생)을 실현하는 과정과 통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생(生) 놀이와 추어나 푸돗던고가 하나로 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통하면서 확장되는, 확장되면서 가닿는 지점들을 평면과 입체로, 페인팅과 드로잉으로, 토우와 알루미늄 주름 관으로, 흙칠과 설치로 열어놓는다.
조규봉 기자 ckb@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