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정진용 기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첫 문장입니다. 21세기 한국 정치권에 유령처럼 떠도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코리아패싱'(Korea Passing)이 그것입니다. 주변 강대국들이 한국을 제외하고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문법조차 맞지 않는 엉터리 영어는 어쩌다 유행어가 됐을까요. 계기는 지난 4월25일 열린 19대 대선후보 TV 토론회입니다. 유승민 당시 바른정당 대선후보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에게 "코리아패싱이라는 말을 아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문 후보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고 답했죠. 유 후보는 이에 단어의 뜻을 설명하며 "문 후보는 사드를 반대하는데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겠느냐"고 힐난했습니다.
이후 코리아패싱은 '약방의 감초'처럼 정치인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최근 야당에서 나온 발언을 정리해볼까요. 지난 21일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는 을지훈련 참여 미군 규모 축소에 대해 "코리아패싱 말고 무슨 설명이 가능한가"라고 했습니다. 지난 16일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코리아패싱을 넘어 주변 강대국이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거부하는 '문재인패싱' 으로 가는 것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고 목소리 높였죠. 한국당은 앞서 지난 14일과 지난 10일 이 용어를 언급하며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했습니다.
청와대와 여권은 여러 차례 야권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청와대는 지난달 28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 발사 도발 후 야권 공세가 시작되자 "왜 그 말이 나오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에서 오자마자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오히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휴가 중인데 통화를 했다. 정상 간 통화가 대개 20~30분 하는 것인데, 거의 1시간 가까이 통화했고, 아주 깊숙한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반박했습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21일 "미국 측도 코리아패싱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라며 "우리의 의견이 중요하게 개진되고 있고,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받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나오는 보수 야당의 '코리아패싱 우려'는 다소 뜬금없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간 바른정당과 한국당이 추구한 외교 노선과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한미동맹'을 안보의 근간으로 여깁니다. 대북정책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엇박자를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죠.
이러다 보니 보수야당이 지나치게 미국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지난 6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반대 시민단체는 주한 미국대사관을 둘러싸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정 원내대표는 이 시위에 참여한 국민을 '극렬 좌파'로 명명했습니다. 또 "한미동맹이 우려된다"면서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겠나"라고 걱정했죠. 바른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대표는 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대한 미국 언론 반응을 신경 썼습니다. 그는 "광복절 경축사를 두고 뉴욕타임스가 '김정은이 노린 한미 분열의 실현'이라고 보도했다"면서 "다른 언론들은 '미국을 향한 직설적 비난이고 한미동맹의 긴장 관계가 형성됐다'고 전했다. 예사롭지 않다"고 우려했죠. 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의 안보를 동맹국에 의존할 수 없다.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한다"는 지극히 '상식적' 의견을 밝혔을 뿐인데 말입니다.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는 한국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속해서 대북 군사적 옵션을 거론해왔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우리 정부가 이에 반대하는 것을 두고 '한국이 소외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현지시간) 북한에 대한 무력대응을 거론하며 "전쟁을 하더라도 저쪽(한반도)에서 하고, 수천 명이 죽더라도 저쪽에서 죽지 이쪽(미 본토)에서 죽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됐습니다. 아무리 '혈맹'이라지만 미국의 자국 이익이 한국의 자국 이익과 동일시 될 수는 없는 법이죠.
전직 통일부 장관들은 잇따라 '야당이 코리아패싱을 언급하는 진의가 의심된다'고 발언했습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22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동맹 강화론자, 동맹 지상주의자들일수록 코리아패싱을 걱정한다"면서 "미국에 쓴소리하면 동맹이 깨지고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여기는 분들이 현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코리아패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이율 배반이다"라고 꼬집었습니다.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 역시 23일 코리아패싱과 '통미봉남'(북한이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는 것) 용어를 두고 "따지고 보면 결국 정치적으로 다른 진영이 서로 공격하려고 만들어 낸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결국 코리아패싱은 야권이 만들어낸 일종의 '프레이밍'(틀 짜기)이라는 지적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일에 '일단 반대하고 보자'는 야권의 조급함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요. 외교 정책에 제동을 걸고 싶다면 싶다면 논리적으로 국민을 설득하면 될 일입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말이죠. 국민을 정체불명의 영어 단어로 현혹하려 한 시도가 아쉬운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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