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문경=김희정 기자] 속리산에서 흘러내린 영강이 진남교반을 코앞에 두고 한껏 굽이치는 곳. 강 빛과 산 빛을 모두 보듬은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청마도예연구소가 터를 잡고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맑은 강바람이 불고, 산을 타고 내려온 햇살이 속살거린다.
푸른 잔디 위에선 옹기들이 따뜻하게 반겨준다. 커다란 옹기 속에는 강에서 온 바람과 산에서 온 햇살이 출렁인다. 옹기는 작업장 안에도 가득하다.
어른 두 명이 안아야 할 정도로 큰 달항아리들은 저마다 다른 색과 모양을 뽐내고 있다. 그 사이로 작업에 심취한 유태근 작가가 보인다. 물레 위에 자신의 몸집보다 큰 항아리를 돌리고 있다. 물레가 돌아갈수록 항아리는 점점 커진다.
◆ ‘보듬이’에 깃든 통일의 염원
그는 큰 달항아리들을 ‘보듬이’라 부른다. 보듬는다는 건 껴안는다는 뜻이다. 껴안는다는 건 용서와 화해다. 그는 작품에 빈부 격차, 남북통일, 한·일 문제, 세계 평화 등 세상의 모든 아픔과 기쁨을 담는다. 작품을 통해 ‘다툼은 거두고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고 말한다.
결국 시대의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끌어안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통일에 대한 간절함을 도자기에 담기 시작한 것도 그런 뜻에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흙을 모아 사발을 빚었고, 독도의 홍합으로 유약을 만들었다. 통일을 상징하는 물고기와 DMZ(비무장 지대)의 철책을 그려 넣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 간절해야 이뤄진다. 물고기와 DMZ를 잔에 그리는 것도 우리 생활 속에서 통일이 자연스레 이야기되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잔으로 물이나 차를 마실 때마다 통일을 떠올리고, ‘그래 통일이 되면 좋지’라는 생각을 했으면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다보면 통일이 가까워지고, 현실로 다가올 날도 있겠지요.”
그의 염원이 통했는지, 독일 코브랜츠 도자박물관에 초빙돼 작품전시와 강연을 했다. 미국, 프랑스, 중국, 영국 등 해외 초대전이 줄을 이었다.
통일 독일의 중심지역인 라이프치히의 그라시아 박물관을 비롯해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트 박물관, 제주 태평양 설록차 박물관, 경북 신청사 등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DMZ는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너무 많아요. 친구 사이에도, 형제간에도 있고, 지역 간에도 있습니다. 그걸 허물고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살았으면 해요.”
◆ 흙으로 빚은 ‘청마의 꿈’
그는 경일대학교 산업공예학과에서 도자기를 전공했다. 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도자기를 만들 정도로 도자기가 좋았다. 졸업 후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일본도자기를 만나게 됐고, 2년 뒤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했다.
문경도자기와의 인연은 그가 문경대학 도자기공예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학교에 장작가마도 짓고, 문경 땅에 숨어있는 가마터 발굴과 문경전통찻사발축제에도 참여했다.
도자기에 대한 그의 부단한 노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에게는 가마를 열 때가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실패작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마저도 그를 가슴 뛰게 한다.
“큰항아리 하나를 만드는데 한 달 보름이 걸립니다. 실패하면 시간, 노력, 비용이 다 날아가는 거지요. 실패해도 기분은 좋습니다. 그래야 문제점을 알고 발전할 수 있거든요.”
그는 흙만 빚는 게 아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그에게는 ‘청마의 꿈’이라는 한지노트가 있다. 글과 그림으로 채워진 노트는 한 장 한 장이 예술작품이다.
노트에 틈틈이 떠오르는 것들을 정리하고, 물레를 돌리기 전에 마음속에 구상한 그림을 한지에 그린다. 남과 북, 예스(Yes)와 노(No), 전통과 현대가 모두 하나로 어우러지길 바라는 생각들이 모여 꿈이 되고 그 꿈들이 작품으로 태어난다.
그는 지난 15년간 몸담아 온 문경대학 도자기공예과가 폐지된 뒤 2015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오대산으로 가 묵언수행을 했다.
“지금까지 강의하면서 말로 먹고살았다면 한 달 동안 말없이 듣기만 했어요. 오롯이 내면에 집중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의 항아리는 하나의 작품이기 전에 그의 삶이자, 커다란 세상인 ‘청마의 꿈’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일까. 수행 중 눈을 감으면 커다란 항아리 앞에서 조심스럽기만 하던 순간이 스쳐지나가고, 항아리를 어루만지던 촉감이 느껴졌다고 했다. 또 항아리를 손으로 ‘퉁퉁’ 두드릴 때 울렸던 소리가 들렸고, 어느새 굳어있던 몸과 마음도 단번에 녹았다고 했다.
수행을 끝나고 돌아온 그는 오늘도 물레 위에 그의 몸집보다 몇 배는 더 큰항아리를 돌리며 강 빛과 산 빛이 더불어 가듯이 더불어 사는 법을 빚는다.
청마도예연구소에는 맑은 강바람이 불고, 햇살이 속살거린다. 이곳에서 옹기를 빚는 그의 눈 속에도 맑은 바람이 일렁이고, 그가 구운 커다란 달항아리 속에는 세상의 희로애락을 담겠다는 ‘청마의 꿈’이 햇살처럼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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