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민수미 기자] 법원이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으로 수사를 받는 국정원 퇴직자 모임 양지회의 전·현직 간부들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모두 기각했습니다. 여론은 물론이고 정치권, 시민단체 그리고 검찰까지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서울중앙지법 오민석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8일 새벽 검찰이 공직선거법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양지회 전 기획실장 노모씨를 상대로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오 판사는 “범죄혐의는 소명되나 수사 진행 경과 등에 비춰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양지회 현 사무총장 박모씨를 상대로 청구한 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씨는 검찰 압수수색을 앞두고 자료를 숨기거나 삭제해 증거은닉 혐의를 받습니다.
법원은 우선 양지회가 수십명의 회원들을 동원해 인터넷 여론조작 활동을 한 정황은 인정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국정원 자체 조사로 확보한 내부 업무 자료와 검찰의 추가 수사를 통해 상당 수준의 증거가 확보됐다는 점에서 구속 수사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는 판단입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증거은닉 혐의로 기소된 자에게 증거인멸 염려가 없다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노씨 신병 확보를 계기로 수사를 확대하려던 검찰에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국정원에서 자체 파악한 외곽팀은 최대 30개,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가 검찰에 수사 의뢰한 전·현직 팀장급 인물은 총 48명에 달합니다. 급물살을 타려던 검찰 수사는 이번 영장 기각으로 인해 차질을 빚게 생겼습니다.
비난 여론은 거셉니다. 판사 출신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최고의원은 “인멸의 대상이 되는 증거가 ‘증거 가치’에 비추어서 요모조모 따져보니까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것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세월호 변호사’로 잘 알려진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각이 이해 안 된다”며 “더 많은 수사가 진행돼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윗선을 숨기기 위해 도주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시민 법 감정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이번 영장 기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일갈했습니다. 네티즌 역시 각종 포털 사이트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글을 게재하며 공분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 판사의 경우 지난 2월 박영수 특수검사팀이 청구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이력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검찰도 이례적으로 법원을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날 ‘국정농단 사건 등에 대한 일련의 영장기각 등과 관련된 입장’ 제하의 자료를 발표했습니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2월 말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새로운 영장전담 판사들이 배치된 후 우병우·정유라·이영선·국정원 댓글 사건 관련자·KAI 관련자 등 주요 국정농단 사건을 비롯해 국민 이익과 사회정의에 직결되는 핵심수사의 영장들이 거의 예외 없이 기각되고 있다. 검찰은 공판에 출석하는 박영수 특별검사에 대해 수십 명의 경찰이 경호중 임에도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한 사람에게도 구속영장은 물론 통신영장과 계좌영장까지 기각해 공범추적을 불가능하게 했다. 일반적인 영장전담 판사들의 판단 기준과 대단히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농단이나 적폐청산 등과 관련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검찰의 사명을 수행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그동안 법원의 결정을 존중하고 감내해 왔지만, 최근 일련의 구속영장 기각은 납득하기 어렵다. 국민 사이에 법과 원칙 외에 또 다른 요소가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어 사법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귀결될까 우려된다.”
국정원 댓글 공작 사건을 일부 적폐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반헌법적 국기 문란 사건으로 규정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쩌면 국정원 개혁은 우리 시대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일지도 모르죠.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권력기관의 공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비상식을 또 다른 비상식으로 덮는 것은 문제해결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