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영화가 있다. 주인공의 상대인 악역을 설명하기 위한 장면들이다.
#장면 1. 연료가 필요한 주인공과 동행은 사막을 차로 달리던 중, 연료가 나는 악당의 기지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악당인 줄 모르고, 귀한 연료를 공급받기 위해 기지를 관찰하며 진입 방법을 고민하던 중 주인공은 기지에서 도망치는 어떤 이들을 발견한다. 한꺼번에 여러 방향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기지에서 쫓아 나오는 악당들. 주인공과 그 동행은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관찰한다. 망원경 속에서 악당들은 곧 도망치던 이들을 붙잡아 잔인한 짓을 자행한다. 여성의 옷이 일부 찢어지고, 남자는 여러 명에게 공격당한다. 그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일그러지는 동행의 표정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은 한참 후 살해당한 이들의 시체를 거두러 간다.
#장면 2. 술을 마시며 차를 운전하던 남자들은 길에서 꽃을 구경하던 소녀를 납치한다. 다음 순간 비닐이 깔린 책상 위에 전라의 소녀가 누워 있다. 납치당한 소녀는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채 울고 있다. 소녀의 주변으로 역시 전라인 남자들이 웃으며 모여 소녀를 희롱한다. 가족이 자신을 구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소녀에게 남자들이 보여주는 건 가족의 시체 사진이다. 피를 흘리는 가족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소녀가 몸부림치고, 그 모습을 관조하던 악역이 일어나 소녀의 목을 줄로 조른다. 소녀의 얼굴이 벌게지고 목이 보기 흉하게 부풀어오른다.
첫 번째 영화는 1981년 개봉된 ‘매드맥스 2 : 로드 워리어’(감독 조지 밀러)의 첫 장면이다. 두 번째 영화는 2017년 개봉한 ‘브이아이피’(감독 박훈정)의 첫 장면이다. 두 영화가 악역과 피해자를 서술하는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여혐 논란’과도 맞닿아 있다.
지난 8월 개봉한 영화 ‘브이아이피’는 당초 ‘신세계’(2012)를 만든 박훈정 감독의 새로운 느와르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신세계’는 기업화된 조폭들 사이에 잠입한 경찰과 조폭 보스, 그리고 경찰 간부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그려 크게 호평 받았고, 많은 팬을 양성해냈다. ‘브이아이피’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기획 귀순’이라는 소재로 화제가 됐으며, 당연하게도 ‘신세계’를 좋게 봤던 팬들은 한결같이 ‘브이아이피’를 고대했다.
그러나 막상 베일을 벗은 ‘브이아이피’는 팬들을 당황시켰다. 작품에 불필요한 선정적인 장면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주인공과 대립하는 악역 김광일(이종석)은 여성을 변태적으로 살해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가학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니만큼 관객의 공분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감독은 판단했다. 그러나 그 공분을 사는 방식은 너무나 선정적이었다.
느와르나 스릴러 등의 장르영화에서 피해자로 여성이 선택되는 일은 흔하다. 실제로 여성에 대한 범죄율이 높은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남성에게 맞설만한 완력이 되지 않고, 성적으로 대상화하기 가장 쉬운데다가 그 사건사고 수가 많기 때문이다. ‘브이아이피’가 김광일의 범죄 대상으로 여성을 선택한 것은 보편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브이아이피’는 김광일의 악행을 단편적으로 나열하는 대신 길고 분명하며 노골적으로 악행을 보여줬다. ‘브이아이피’가 김광일의 악행을 노출하는 방식은 피해자와 주인공의 입장에서 분노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의 시선에서 최대한 세밀하게 여성이 나체로 죽어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포르노가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대부분의 포르노들은 성관계를 다룰 때 철저하게 여성만을 대상으로 필름을 사용하며, 포르노를 소비하는 이들 또한 여성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여성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브이아이피’에서 김광일의 악행은 영화의 주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에게 행동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악행을 훨씬 세련되게 표현하는 영화적 기법은 이미 시장에 수십 가지가 나와 있다. 개봉한 지 35년이 된 영화 ‘매드맥스 2’가 악당들의 악행을 설명하는 방식은 간접적이지만, 더없이 효과적이다. 관객은 ‘매드맥스 2’를 보며 주인공 맥스를 응원하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눈살을 찌푸릴 필요도, 당황할 이유도 없다.
‘브이아이피’를 본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여성관객들은 영화 ‘브이아이피’를 ‘여성혐오’영화로 규정하며 불쾌함을 표시했다. 피해 여성에 대해 동정적이기보다는 가해자에 가까운 시선으로 소비하는 필름에 불매운동까지 번졌다. 박훈정 감독은 해당 논란에 관해 “이 장면을 멀리서 처리해 보거나 잘라보기도 했다”며 “그러면 김광일 패거리의 악행은 드러나지만 김광일이 얼마나 악마적인지는 드러나지 않더라”라며 김광일의 악마성을 강조하기 위해 해당 장면을 삽입했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내가 생각 외로 여성을 몰랐다”는 박훈정 감독은 “이런 반응은 상상도 못했다”고 전했다.
‘브이아이피’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영화를 만든 감독 본인이 가해자의 악행을 치장하고 꾸미는 데 여념이 없다. 가해자의 악마적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서다. 가해자가 가해를 하는 내용의 영화가 아니라 주인공들이 가해자를 징벌하는 내용이 골자인데, 감독은 가해자를 위해 피해자를 전시한다. 단순히 악당 찬양이 아니라 여성혐오 영화인 이유도 분명하다. 처참하게 죽은 모습만 보여지는 다른 남성 피해자들에 비해 여성 피해자들은 과하게 벗겨지고 피해 과정이 생중계된다. 작품 내에서 이름이 있는 여성 캐릭터가 하나 없다. 여성은 철저하게 도구로서 사용된다. 여성 관객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브이아이피’는 손익분기점인 340만 관객을 채 넘지 못한 137만 관객에 그쳤다. 개봉 시일이 한참 지났기에 140만까지 가기도 요원하다. 박훈정 감독은 차기작 ‘마녀’의 캐스팅 단계를 밟고 있다. 여고생이 주인공이라는 ‘마녀’에 대해 여성 관객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②에 계속)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