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e스포츠협회가 회원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대한체육회에서 제명됐다. 체육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아시아올림픽위원회(OCA) 등 국제 스포츠 기구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는 단체다. 체육회 정회원 가입은 ‘결승선을 통과했다’ 할 만큼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 터라 이번 e스포츠협회의 중도 탈락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제명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 뒤 e스포츠협회는 “1년 내에 체육회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밝혔다. 체육회는 지난해 6월 e스포츠협회를 ‘유예단체’로 분류하고 1년 동안 시간을 줬다. 그 사이 조건을 충족하라는 건데, 당초 인프라가 없었던 협회는 속절없이 자격을 박탈당했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까?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체육회 한 관계자는 “그런 일은 결단코 없다. 조건만 충족하면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했다. 그는 “중요한 건 이사회에서의 심의다. 어떤 시선에 의해 가부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정식 스포츠화 도전한 협회, ‘당연한 것’ 안 했다
협회의 체육회 제명으로 갈 길 바쁜 국제 e스포츠 종주국 경쟁에 제동이 걸렸다. 협회는 “e스포츠뿐 아니라 다수 스포츠 단체들이 요건이 미 충족되어 등급이 조정됐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체육회는 지난 8월 이사회에서 94개 회원단체 중 23%에 해당하는 22개 단체를 제명했다. 이 중 정회원 단체가 4곳이나 될 정도로 ‘피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통합체육회가 출범하며 제·개정된 가입·탈퇴규정 제5조(준회원 단체의 가입요건)에 따르면 스포츠 협·단체는 9개 이상의 시·도 종목단체(지부)가 시·도체육회에 가입되어 있어야 준가맹 자격을 얻는다. 제6조 ‘인정단체’의 경우 6개다.
이 조건이 까다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도체육회에 들어가려면 자치구 체육회에 속한 과반의 지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가령 서울시체육회 인가 체육단체가 되려면 종로구 등 25개 서울 자치구 중 절반(13개) 체육회에 군소 지부가 속해있어야 한다. 다른 시·도체육회도 이에 못지않은 자격조건이 걸려 있다.
체육회는 통합체육회 출범으로 까다로워진 조건이 ‘당연한 것’이라 했다. 스포츠 단체의 시·도 체육회 소속 지회 보유 역량은 그간 허다하게 대두된 기본 소양이란 거다.
대한체육회 종목육성부 담당자는 “전국대회가 열리면 해당 종목에서 시·도 동호인들이 나올만한 역량이 돼야 한다”면서 “생활체육과의 통합으로 규정 정비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됐다. 그 결과 세부적으로 조건이 생긴 것”이라 설명했다.
대한체육회가 통합체육회 출범 이전(2016.3)에 사용한 가맹·탈퇴 규정(2012.2.7 개정)에서는 정회원 가맹 조건을 “11개 이상의 시․도지부를 소유할 것”으로 적시했다. 한국e스포츠협회는 2008년 6월 광주지회를 설립한 뒤 부산, 경북, 전북, 전남, 강원, 인천, 경기, 서울, 제주, 경남 지회를 설립해 정확히 11개 지회를 맞췄다.
그러나 협회는 시·도체육회에 속한 지회를 단 한 개도 보유하지 못했다. 하물며 당장 시·도체육회 가입 여지가 있는 지회도 현재로선 전무하다. 처음부터 시·도체육회 가입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합리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시·도체육회는 대한체육회에서 지역으로 뻗은 뿌리와 같다. 정식 스포츠화에 도전 중인 e스포츠협회가 18여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알맹이’를 놓쳤다고 상상할 수 없다. 가맹 규정으로 내걸은 지회 요건을 시·도체육회 가입과 연결 짓는 건 기초적인 상식이다.
정회원 가맹돼있는 한 체육단체 관계자는 “시·도체육회가 모여 한 나라의 체육회가 되고, 그들이 모여 IOC가 되는 것”이라면서 “업계 종사자라면 당연히 아는 내용이다”고 전했다.
체육부 관계자 역시 “시·도체육회와 회원종목 경기단체가 있어야 대한체육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03년 설립된 대한치어리딩협회는 지난해까지 4개 시·도체육회 소속 지회를 보유해 체육회 가입 기준(6개)에 미치지 못하며 유예단체가 됐다. 그러나 이들은 1년 만에 2개 시·도체육회 가입을 성사시키며 얼마 전 재가입에 성공했다. 내실 있는 체계를 바탕에 둔 발 빠른 대처였다.
참고로 한국e스포츠협회는 1999년 12월 창립총회를 하고 이듬해 2월 정식으로 출범했다.
▶e스포츠 위력 스스로 깎아내린 협회
e스포츠는 세계적 추세이고 한국은 e스포츠 종주국이다. e스포츠협회는 한국 대표 e스포츠 단체다.
e스포츠가 뉴(new)스포츠에 속한다지만 최근엔 기존 메이저 스포츠 종목 못지않은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e스포츠의 시장규모와 선수들의 연봉, 상금, 국제대회 시청자수 등 숱한 수치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e스포츠협회는 11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다른 제명 단체들과 자신을 엮으며 “e스포츠에만 과도하게 초점이 맞춰져 건설적이지 못한 논리로 악용되는 것은 유감스럽다”고 했다.
e스포츠협회는 프로스포츠와 생활체육을 아우를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커트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다른 스포츠 단체에 비할 바가 아니다.
e스포츠는 체육회에서 말한 ‘전국에서 동호인들이 대회에 나올만한 역량’이 된다. 2014년 10월28일 제주도에서 열린 제95회 전국체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e스포츠는 4개 종목에 13개 지역 72여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그 다음해 강원도 전국체전에선 16개 지역 150여명이 참가해 2배 이상 뛰었다.
2007년 첫 발을 뗀 전국단위 아마추어 대회 ‘대통령배 KeG’는 전국 16개 광역시·도가 참가하고 있다. 참가 신청자가 많아 지역 예선전을 매년 치를 정도다. 온라인 게임 인구 2000만에서 비롯된, 여타 메이저 스포츠 종목 못지않은 인기다.
이 모두가 생활 체육으로서 충분한 수요가 있기에 가능한 성과다.
이번 회원종목단체 등급심의에서 1개 시·도체육회 소속 지회가 부족해 제명된 모 체육단체 관계자는 “전국적으로 동호인 풀(pull)을 끌어내는 게 가장 중요하면서 힘들다”고 털어놨다. 그는 “다른 단체들도 비슷한 처지다. 비인기종목으로 단체를 꾸리고 체육회에 들어가는 건 매우 힘겨운 도전이다”고 말했다.
사실 e스포츠협회는 시·도체육회에 지회를 집어넣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입장문에서 스스로 언급한 공인 e스포츠 PC클럽 사업이 바로 그 예다. 결격 단체로 격하된 지 4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시작해 지금까지 협회 공식 홈페이지에 등록된 PC클럽은 72개다.(협회 확인 68개) 이들이 자치구 지회가 되려면 행정적인 절차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지역 거점으로서 상당한 매력이 있는 건 분명하다. 대한체육회 인정단체로 들어간 2009년부터 시작했다면 지금쯤 어땠을까?
전국에 치어리더 모임이 PC방보다 많을 리 없다. 분명 지난 2015년 준회원 가입은 한국e스포츠협회가 거둔 소기의 성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체육협회로서의 기본소양인 시·도체육회 가입 업무를 등한시했고, 결국 까다로워진 규정으로부터 자신들의 공든 탑을 지켜내지 못했다.
협회는 입장문에서 시·도체육회 가입을 ‘새롭게 마련된’ ‘새로운 기준’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기준 여부와 관계없이 마땅히 추진해야할 일이었다. 느리게 호흡하지 않고, 멀리 바라보지 않은 결과다.
이다니엘, 윤민섭 기자 dn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