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스포츠 종주국으로서 한국의 위상은 공고하지만 정작 국내 대형 게임사들의 수준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엔씨소프트, 넷마블, 넥슨. 이른바 ‘3N’의 사업 논리는 대한민국 게임 산업과 e스포츠 미래에 건설적인 담론을 제시하지 못한다. 넥슨이 공들여 지은 e스포츠 경기장은 연일 외제 게임 환호성으로 가득하다.
▶뜻이 없는 곳에 길도 없다
한국은 e스포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유지 중이다. 그러나 자생적으로 e스포츠 게임종목을 길러내지 않는 한 세계 시장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국산 게임의 가장 큰 문제는 e스포츠로서 최소한의 ‘각’을 볼만한 신작이 안 나오고 있다는 거다”면서 “과거 IP를 만들어줬으면 이를 등에 업고 e스포츠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갔을 텐데 모바일게임만 만들어 재끼고 있으니깐 지금의 협소한 시장 꼴이 난 것이다”고 꼬집었다.
2000년대 초 블리자드의 역작 스타크래프트가 e스포츠로 발돋움했고 이후 17여 년 동안 리그 오브 레전드(LoL), 오버워치 등이 국내 e스포츠 시장의 명맥을 이었다. 그 사이 3N은 블레이드앤소울(블소), 카트라이더, 서든 어택 등으로 대회를 열었지만 당초 외제 게임과 ‘키 재기’를 할 만한 수준이 못 됐다. ‘변두리 대회’ 이상 나아가지 못한 셈이다.
글로벌 게임사와 국내 게임사를 규모에서 비교하는 건 적절치 않다. 그러나 ‘좋은 게임’은 규모로 성사되지 않는다. 블루홀은 큰 자본이 있어서 플레이어언노운 배틀그라운드를 탄생시킨 게 아니다.
엔씨소프트는 거대한 몸집과 별개로 세계적으로 두루 알려진 명작이 없다. 당연히 e스포츠 종목으로 내세울만한 게임도 없다. 블리자드가 지난해 오버워치 출시로 e스포츠 시장을 뒤흔든 사이 엔씨소프트는 리니지m에 역량을 집중했다. 리니지m으로 하루 만에 130억 원을 벌어들였다는 게 최근 이들이 게임사로서 유명세를 탄 뉴스거리다. 게임 팬들은 리니지m이 왜 강원랜드에서 출시되지 않았냐며 조롱하고 있다.
넥슨과 넷마블은 자체 개발한 게임보다 소위 ‘잘 되는’ 게임을 인수하거나 퍼블리싱하는 방식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넥슨이 서비스 중인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은 2008년 벨브의 라이선스를, 피파온라인은 2012년 라이선스를 사들인 결과물이다. ‘순혈’ 게임 중에선 카트라이더(넥슨), 서든 어택(넷마블→넥슨)이 아직까지 해당 게임사 대표 대회로 명맥을 잇고 있다. 그나마 팬덤이 있는 ‘액션 토너먼트’의 던전앤파이터와 사이퍼즈는 네오플이 제작한 것을 2008년 넥슨이 인수했다. 인수 후 이 게임은 캐릭터 보이스를 과금으로 연결하는 황당한 사업 전략으로 빈축을 샀다.
최근 블리자드는 e스포츠 시장의 중심을 한국에서 북미로 옮기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e스포츠로 제2의 ‘ESPN’을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왜 한국은 이 꿈에서 도태되었을까. 국내 게임사들이 얼마나 ‘띵작’ 개발에 등한시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정성’보다 ‘돈의 논리’ 쫓은 3N
20여년 가까이 e스포츠계에 몸담은 임태주 OGN 국장은 앞선 쿠키뉴스와의 인터뷰([기획] e스포츠는 축구처럼 될 수 있을까?)에서 “e스포츠가 되려면 무엇보다 ‘공정성’이 실현돼야 한다. 같은 조건에서 실력을 겨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고 했다.
‘공정성’은 비단 대회에서뿐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에게도 닿아야 한다. 성공한 e스포츠 종목의 면면을 살펴보면 외적인 요인이 게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LoL과 오버워치,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스타크래프트까지 어느 하나 ‘과금’이 게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3N은 다르다. ‘Pay to win’ 대개 이들 게임은 돈을 투자하면 더 강해져서 손쉽게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다. 근래 넷마블이 e스포츠 대회화한 리니지 레볼루션 공성전의 경우 과금 정도에 따라 경쟁자간 출발선이 달라진다. 엔씨소프트는 블소 대회전용 클라이언트를 개발할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지만 정작 유저들은 ‘과금 대결’이 강제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껏 MMORPG가 e스포츠로 연결되지 못했던 이유는 규격화된 경쟁 플랫폼을 구성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투기장(아레나)이 e스포츠 역사를 잇고 있는 좋은 예다”면서 “국내 RPG는 그런 플랫폼을 말하기 앞서 공평성이 심각하게 결여돼있다. e스포츠란 용어를 붙여선 안 된다”고 평가했다.
상당수 팬들은 두 게임으로 치르는 대회가 일반 유저와 거리가 먼 ‘금수저 대결’이라고 말한다. 게임 유저 ‘로**’는 “대회나 게임 콘텐츠가 계속 개발되지만 본질적으로 과금을 유도하는 운영 때문에 많은 이들이 떠났다”면서 “대개 파티 플레이를 하는 기초 자금으로 200만 원을 말한다. 그리고 달마다 최소 20만 원을 투자해야 장비 세팅을 유지할 수 있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유저 ‘윈*’는 “국내 게임사에게 e스포츠란 마트 미끼 상품과 같다. 도박장보다 더한 사행성을 없애지 않고 대회를 한다는 얘길 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일단 돈으로 밀어 붙인들…
임 국장은 “e스포츠에서 팬들이 볼 수 있는 건 컴퓨터 앞에 앉은 선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 선수들의 컴퓨터 안에 있는 영상을 뽑아내고 편집해서 누가 우세하고 어떤 재미가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게임이 e스포츠가 되려면 생각보다 까다로운 ‘자격 심사’를 거쳐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게임이 재밌어야 한다. 재밌으면 자연히 유저가 생기고 팬층이 늘어난다. 그 다음은 ‘보는 재미’다. 흔히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수치는 시청자 숫자로 드러난다. 그 이후엔 중계 역량(옵저빙), 대회 확장 가능성, 관중 풀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다. 이 즈음이 e스포츠 대회로의 ‘각’을 볼 수 있는 시기다.
e스포츠는 ‘장르 선점’이 중요한 흥행 요인으로 평가된다. 블리자드는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출시 후 잠실체육관을 빌려 국제대회를 여는 등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지만 흥행으로 연결시키진 못했다. 비슷한 장르인 리그 오즈 레전드가 이미 국내 시장에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도타2도 ‘참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13년 국내에 연착륙을 시도했던 도타2는 우승상금 1000만 원을 걸며 흥행몰이에 나섰지만 초라한 성적표만 남긴 채 쓸쓸이 퇴장했다. 당시 퍼블리셔는 넥슨이었다.
한 스트리밍 방송사 PD는 “국내 e스포츠 시장의 경우 비슷한 장르끼리 묶이는 경향이 있다”면서 “LoL이 국내에서 뜬 뒤 MOBA장르 5~6게임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썩 좋은 성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넷마블이 야심차게 대회 운영 중인 펜타스톰은 간편한 모바일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e스포츠 대회로 매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유사 게임’으로 여겨지는 탓에 LoL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펜타스톰 유저 A(18)군은 “집에서 컴퓨터를 할 수 없어서 대리 만족으로 이 게임을 한다.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이유에서다”면서 “이 게임으로 하는 대회를 볼 이유를 못 느낀다. 롤챔스(한국 LoL 대회)를 보는 게 낫다”고 말했다.
한 e스포츠 마케팅 관계자는 “펜타스톰 대회는 국내 e스포츠 시장의 맥을 잘못 짚은 나쁜 예다. 전혀 연구하지 않은 결과물”이라면서 “도타2 등의 사례에서 규모의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됐다. 돈을 쏟아 붓고 메이저 게임 방송사에서 중계를 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내 게임사들이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몇몇 모바일게임에서 돈 맛을 봤다. 그러나 e스포츠는 게임 콘텐츠뿐 아니라 시청자 풀이 어느 정도 형성될지를 가늠해야 한다. 내실이 없는 대회 운영은 돈 낭비다”라고 덧붙였다.
이다니엘 기자 dn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