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마녀의 법정’의 역주행 속도는 빨랐다. 오랜 기간 월화극 정상을 지키던 SBS ‘사랑의 온도’를 밀어내고 시청률 1위를 차지하는 데는 일주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방송 첫 주 2회분이 공개된 이후 시청자들 사이에 빠르게 입소문이 퍼진 결과다. 무엇이 ‘마녀의 법정’을 1위에 올려놓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사전 정보만으로는 ‘마녀의 법정’이 화제의 드라마로 떠오를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주연을 맡은 배우 정려원, 윤현민의 무게감이 크지 않았고, PD나 작가도 마땅한 히트작이 없었다. ‘쌈, 마이웨이’ 이후 시작된 KBS2 월화드라마의 부진이 3달 동안 이어진 상황이었다. ‘마녀의 법정’이 첫 방송되기 바로 직전에 방송된 ‘란제리 소녀시대’의 마지막회 시청률은 3.7%(닐슨코리아 기준)에 불과했다. 서현진과 양세종의 매력을 내세운 ‘사랑의 온도’가 3주에 걸쳐 고정 시청자를 붙잡아두고 있었다.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뒤늦게 ‘마녀의 법정’을 시청한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녀의 법정’은 오직 출세만이 목표인 마 검사가 아동·성범죄 부서로 좌천당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마 검사는 부장 검사의 성추행 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모른 척할 정도로 정의나 도덕관념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승진을 시켜준다는 부장 검사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180도 돌변해 징계위원회에서 폭언과 폭행을 할 정도로 거침없다. 반면 여 검사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누구보다 피해자들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인물이다. 선배인 마 검사와 달리 자진해서 승진과 거리가 먼 아동·성범죄 부서로 갈 정도로 정의와 신념을 중요시한다.
지상파 드라마에서 숱하게 본 전형적인 내용이다. 정반대 성격의 두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결국 연인으로 발전한다는 전개를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마 검사가 여성(정려원)이고, 여 검사가 남성(윤현민)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성 역할을 바꾼 것만으로도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로 돌변해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얻는다.
생각해보면 정의로움보다 출세를 지향하는 문제 많은 검사나 후배를 괴롭히는 못된 선배, 먼저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상대에게 저돌적으로 고백하는 주인공, 아픈 과거를 숨기고 살아가는 주인공 등은 항상 남자의 몫이었다. 여자 주인공은 그런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자라 남자 주인공을 보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새 드라마의 공식에 익숙해진 것이다. ‘마녀의 법정’은 마치 시청자들과 게임을 하듯이 기존 드라마의 고정관념을 하나씩 깨면서 의외의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신선한 설정 외에 더 새로운 것이 없었다. 지난달 17일 방송된 4회에서 12.3%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마녀의 법정’은 이후 소폭 하락을 거듭하며 9%대까지 내려왔다. 초반 상승세를 이어가는 데 실패한 것이다.
‘마녀의 법정’은 권선징악이 주제인 착한 드라마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이듬이 여진욱을 만나 타인에 대해 공감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스토리는 흥미롭지만, 경찰청장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조갑수(전광렬)라는 거대 악이 등장하면 이야기에 힘이 빠졌다. 거기에 마이듬과 여진욱의 연애 감정까지 진정되자 드라마를 계속 봐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마녀의 법정’이 KBS 드라마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전 연령층을 타깃으로 하는 만큼 언제 TV를 켜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스토리가 필요하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감정이 생기는 장면에서 시청률이 높아진다는 공식도 의식해야 한다.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는 만큼 공익적인 측면도 챙겨야 한다. 완수해야 할 많은 미션을 하나씩 드라마에 녹여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 사이 기대와 다른 전개에 실망하고 떠나는 일부 시청자를 붙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지상파 드라마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다. 하지만 드라마를 소비하는 환경이 다변화된 영향으로 시청률 1위 드라마가 한 자릿수에 머무는 것이 점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녀의 법정’은 케이블·종편 채널에서도 보여주지 못한 신선한 발상을 지상파 드라마에서 시도한 희귀 사례다. 앞으로 방송될 분량을 통해 그저 가능성을 보여준 것에 만족할지, 기대를 뛰어넘는 전개로 명작 드라마의 반열에 오를지가 결정된다. 동시에 2017년 현재 지상파 드라마의 가능성과 한계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마녀의 법정’은 KBS의 단단한 벽을 허물 수 있을까.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