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국가책임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시절 주요공약 중 하나다. 지난 6월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운영하는 서울요양원에 직접 방문해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공약이행을 약속했다. 그리고 정부는 공약을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지난 9월 18일에는 보건복지부(장관 박능후)가 ‘치매국가책임제 대국민 보고대회’를 열고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10월 1일에는 치매환자의 중증도를 측정해 산정특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신경인지기능검사에 대한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됐다.
하지만 ‘치매로부터 자유로운 나라’, ‘치매 부담 없는 행복한 나라’라는 표어가 실현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당장 치매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며 돌보는 의사들이 치매환자를 꺼리는 상황이 곳곳에서 연출되고 있다.
◇ 섣부른 제도시행에 곳곳이 빈틈… ‘폭탄’은 의사 품에
지난 5일 대한노인의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만난 신경외과 또는 정신의학과 전문의들은 하나같이 치매국가책임제 시행에 따른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이 환자들의 고성과 욕설에 시끄럽다는 것이다.
실제 충청남도에서 천안두신경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신현길 노인의학회 학술부회장은 “어제(4일)도 외래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다. 환자 보호자는 모두가 중증이라고 생각하고, 해놓으라고 한다”면서 “국민은 다 되는 줄 알고 의사는 차단하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로 ‘치매는 국가가 책임진다’는 인식이 국민들에게 뿌리내렸지만, 정작 치매 진단부터 치료에 대한 건강보험 보장범위 등은 제한적이고 빈틈이 많아 임상현장에서 의사와 환자가 충돌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신 부회장은 “최근 진료현장에서 의사들이 노인치매환자 진료를 꺼리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당장 치매환자와의 의사소통이 어려워 환자와 보호자를 오가며 2중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데다 여러 복합질환을 가지고 있어 고려해야할 점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당뇨와 같은 만성질환이나 희귀질환이, 중증질환 산정특례, 예방접종, 환자진료의뢰 등 정부가 시행하는 시범사업과 제도마다 개별적으로 입력ㆍ관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물론, 환자나 보호자의 높은 요구, 여유가 부족하고 고집스런 행동들은 의료진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임상현장의 분위기가 신 부회장 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은아 노인의학회 부회장도 “의사에게 공(책임)을 넘기고 있다. 너무 급하게 (정책이) 시행돼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다보니 보호자들의 불만도 쌓여가고 있다”고 말했다.
◇ 현실 반영 안 된 급여기준에 환자 피해 우려
게다가 이 같은 관계의 어려움만이 전부가 아니다. 10월 1일 시행된 신경인지기능검사에 대한 건강보험 급여기준과 증증치매환자 등록과정에서 상당한 허점이 존재해 임상현장에서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 부회장은 “중증치매환자 산정특례 적용이나 신경인지검사 보험급여 적용기준에 사각지대가 있다”고 밝혔다. 양현덕 학술이사도 “산정특례가 적용되는 기준이 의학적 판단과 달라 환자의 피해가 우려되고, 제도적 빈틈으로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치매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신경인지기능검사에 대한 복지부 급여기준 고시에 따르면 의료기관은 만60세 이상 환자 중 간이정신진단검사(MMSE, Mimi Mental State Exam) 10점 이상이고, 치매척도검사인 CDR(Clinical Dementia Rating) 0.5~2점 또는 GDS(Global Deterioration Scale) 2~6점 인 경우에 한해 급여대상이 된다.
급여산정(지급) 횟수 또한 첫 치매 진단 시와 진단일로부터 년 1회 또는 기타 환자상태가 급격한 변화가 관찰돼 진료 상 추가시행이 필요한 경우 사례별로 인정된다. 만약 연령기준이나 산정횟수를 초과할 경우에는 치매에 해당돼도 검사비용의 80%를 환자 본인이 부담해야한다.
간이정신진단검사와 치매척도검사 둘 중 하나만 시행했거나, 둘 모두를 시행했지만 경도인지장애 또는 경증ㆍ중증 치매가 아닌 경우에는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로 100% 환자가 비용을 내야한다.
이와 관련 이 부회장은 “간이검사결과 10점 이상은 되고 8, 9점은 안 된다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8~9점인 환자들도 인지장애가 심한 경우가 있는데 이 환자들은 약을 쓰지 말라는 것이냐”고 반문하며 기준을 점수해 칼로 자르듯 나눠서는 안 된다는 뜻을 피력했다.
더구나 MMSE와 CDR 또는 GDS 2가지 검사를 모두 시행해야 급여 대상이 된다는 것이나 조기치매가 발병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연령 제한을 두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기준으로 필요에 따라 약을 써서 치료를 해야 하는데 기준이 오히려 치료를 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증치매로 진단돼 본인부담은 10%만 내면되는 산정특례 적용을 받는 경우도 허점이 존재하는 듯하다. 정부는 신경인지검사를 통해 초록이 치매 혹은 루이소체 치매와 같은 드문 14종의 치매는 V800, 알츠하이머처럼 노년기 치매로 분류되는 12종은 V810으로 나눠 산정특례 적용기준을 달리하고 있다.
만약 V800에 해당하는 경우 한번 치매로 등록하면 5년간 산정특례가 적용되지만 V810의 경우 1번에 60일, 연간 최대 120일까지만 등록할 수 있다. 나머지 기간은 중증이어도 본인부담 인하혜택을 받을 수 없다. 심지어 섬망 등이 있는 치매환자가 많이 가는 요양병원에서는 산정특례를 등록조차 하지 못한다.
이와 관련 이 부회장은 “치매 관련 제도가 너무 복잡해 신경과 의사도 참여하기 어렵다. 담당 건강보험공단이나 복지부에 물어봐도 제대로 알려주지 못 한다”며 “100년은커녕 1년은 내다보고 정책을 수립해야하는데 몇 달 만에 급하게 추진돼 문제가 속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양적인 것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며 “안 되던 건강보험 적용을 해준다는 측면에서는 좋지만 제대로 천천히 전문가 의견과 임상현장의 상황을 확인하며 드러난 사각지대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양 학술이사도 “국가는 생색만 내고 뒤로 빠진 채 의사들이 긴 진료시간을 투자해 욕먹어가며 힘들게 환자를 납득시키고 이해를 구하고 있다”며 “정부 발표대로라면 다 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범사업 등을 통해 (치료과정) 전체를 보고 개선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신 부회장은 치매환자를 꺼리는 의사들에게도 일침을 가했다. 의과대학 교육과정에서 치매에 대해 단편적으로만 다뤄지고, 여러 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 및 치매환자에 대한 복합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습교육이나 전공의 수련과정에서도 치매 입원환자를 보는 경우가 거의 없고, 인지기능검사 시행 경험이나 관리경험은 경증 외래환자에 국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문제도 거론하며 개선을 당부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